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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영, <국제관계사>

딸기21 2024. 4. 8.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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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사
박건영. 사회평론아카데미. 4/7


정말 재밌었다. 몇 년 새 현대 세계사 책을 좀 읽었지만 사실상 유럽사였는데 이 책은 국내 학자의 책이라 아시아, 한국과의 연관성이나 맥락을 잘 설명해줘서 넘넘 좋았다. 유럽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도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고. 뒤에 가서 공개된 문헌 자료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20세기 세계사 책으로 최고다!!!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을 안보와 동맹이라는 전략적 이익의 관점에서만 보면 전쟁의 책임 소재가 모호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독일과 관련하여 자신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생존을 위해 할 수 없이 엮여 들어갔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관련 비밀문건이 공개되면서 독일의 책임을 부각하는 관점이 크게 대두하였다. 독일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즉 독일이 세계전략적 차원에서 대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이를 미리 계획하였으며,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69

독일은 1880년까지는 중동에 대한 투자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1890년 재상 비스마르크의 퇴진 후 제 국주의를 주창한 빌헬름 2세가 직접 나서면서 상황이 급반전하였다.
독일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석유가 나올 경우 접근로를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 항으로의 철도연결을 통해 영국 및 프랑스가 지배하는 수에즈 운하를 우회해서 독일제국의 동쪽 식민지들에 대한 접근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재정이 궁핍한 오스만터키로서도 독일이 만들어주는 이 철도를 이용하여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고, 나아가 1882년 우라비 봉기(Urabi Revolt) 이후 영국의 군사적 지배하에 들어간 이집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바그다드 철도 계획은 중동과 인디아에 핵심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를 자극하였고, 영국의 3C(Cairo-Cape Town-Calcutta) 정책과 독일의 3B(Berlin-Byzantium-Baghdad) 정책이 대립하는 경직 된 전략구도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영국은 독일이 철도를 통해 페르시아 만에 해군 기지를 건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1899년 바스라의 알 사바 부족장과 합의하여 쿠웨이트를 보호국화하였다.
-85

국민 여론도 제국주의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많은 수의 압력 단체나 사회단체들은 정부에 대해 식민지를 만들고 확대할 것을 요구하였다. 1890년 7월 1일 영국과 독일 간에 체결된 '헬고란드-잔지바르 조약(Helgoland-Zanzibar Treaty)이 일례가 될 수 있다. 독일은 이 조약을 통해 잔지바르를 영국에 양도하였지만, 영국령인 헬고란드 열도를 획득하여 키일(Kiel) 운하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북해 항구들에 대한 접근로를 확보하였다. 전략적 관점에서 보면 독일이 큰 이익을 취한 경우였다. 그러나 독일 여론은 들끓었고, 1891년 범독일리그(Alldeutscher Verband, The Pan-German League)라는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민족주의적 압력단체를 만들어냈다. 20세기에 들어서 범독일 리그는 반유대주의 극우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독일제국주의 지지자들의 세력기반 이 되었다.
또 다른 예는 보어전쟁(1899-1902)을 둘러싼 영국과 독일의 여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5년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 독립국에 대한 영국의 '제이미슨 공격(the Jameson Raid)’이 실패로 돌아가자 독일의 빌헬름2세는 폴 크뤼거 트란스발 대통령에게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격퇴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크뤼거 전문(the Kriger Telegram)'을 보냄으로써 그간의 중립노선을 폐기하고 보어인들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다.
-87

독일의 운명적인 지리적 조건과 프랑스•러시아 간 동맹으로 인해 동부 및 서부에 2개 전선을 전제하고 구상된 쉴리펜 계획은 극대화된 안보상호의존성 또는 쇠사슬에 비유되는 동맹의존성(chain-ganging)의 증대와 함께, 유럽에서 독일의 이익이나 동맹이익과 관련해 분쟁이 발생할 경우 바로 프랑스와 러시아 등 유럽 전체를 개입시키는 구조적 경직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전쟁계획은 병력이동의 신속성을 필수화함으로써 외교적 해결의 가능성에 심각한 제약을 부과하였을 뿐 아니라 중립국에 대한 침공이 갖는 국제정치적 함의를 무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도록 만든 구조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103

1915년 1월, 오스만터키의 이스마일 엔버 베이는 '사리카미스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일대 교전을 했으나 대패하였다. 엔버 베이와 '청년 터키당' 정부는 패전의 책임을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지우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의 의용군으로서 반역을 했다는 것이다. 1915년 4월 24일 오스만터키 정부는 250여 명의 아르메니아 지식인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체포, 추방,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해 8월 오스만터키는 아르메니 아인들을 식량과 물을 주지 않은 채 시리아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 '대학살 연구소(Center for Holocaust and Genocide Studies)'에 의하면 1914년도 이전에는 모두 2,133,19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제국에 거주했다. 1922년에 이르러 아르메니아인들의 수는 387,800명에 불과하였다. 현재 터키 고등학교 역사책에는 "조사 결과 약 300,00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전쟁과 질병으로 인해 죽었으며, 같은 기간에 아르메니아인들은 600,000명의 터키인들을 죽였고 500,000명을 보금자리에서 밀어냈다"고 쓰여 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 하는 국가는 2022년 현재 33개국에 불과하다. 이 목록에 한국, 중국, 일본, 영국은 없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도 없다.
-142

유럽에서의 대전은 아시아에도 파급효과를 내었다. 영일동맹이 움직인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팽창을 견제하던 영국과 러시아의 만주 및 조선 공략을 우려하던 일본은 1902년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위협에 공동대처하고자 하였다. 영일동맹의 첫 번째 테스트는 러일전쟁이었고, 대성공이었다. 일본이 1904-05년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영일동맹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는 영일동맹을 의식하여 러일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나아가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거부함으로써 러시아 해군을 아프리카 남단을 경유하여 장기간의 항해를 하도록 강제하였다. 이후 영일동맹은 지속되었고, 필리핀을 취하기 위해 일본의 양해를 필요로 했던 미국도 '미영일3국협력체제'의 일원이 되어 일본이 1910년 조선을 강제합병하는 데 일조하였다.
-143

'체코군단(the Czechoslovak Legion)'이란 전쟁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이 중심이 되어 키예프 근처에서 결성한 의용군 부대였다. 이들은 러시아가 개전을 선언하자 미묘한 입장에 빠졌다. 결국 그들은 러시아에 충성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볼셰비키 정부는 스탈린 명의의 전문을 통해 체코군단이 서부전선으로 이동배치되도록 러시아 출국에 편의를 제공하겠다고 연합국에 약속하였다. 이들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은 발틱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었지만, 독일의 잠수함 공격 가능성으로 인해 이 선택지는 배제되었다. 대신 그들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출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려는 영국과 일본 해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볼셰비키는 계획을 변경하여 체코군단의 이동을 중지시켰다. 볼셰비키 정부의 전쟁인민위원 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인 트로츠키는 이들에게 적군(Red Army)에 합세하든지 무장해제 후 수용소로 돌아가든지 양자택일하라고 통첩하였다. 트로츠키의 이 결정은 볼셰비키 정부를 위험에 빠뜨렸고, 후일 스탈린이 그를 축출하는 데 사용되었다.
트로츠키의 명령에 불복한 체코군단은 이동 과정에서 볼셰비키군과 교전하였다. 체코군단은 이 무력충돌에서 승리하여, 철도에 연한 심비르스크(Simbirsk, 현재는 올랴노브스크 Ulyanovsk) 등 주요 도시를 점거하고,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하여 볼가(Volga) 중심부에서 반볼셰비키들과 함께 대규모 세력을 규합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 내 반볼셰비키 운동을 고무하게 된 체코군단은 지역의 반볼셰비키 세력 및 연합국의 군대와 결합하고 바야흐로 러시아를 본격적인 내란으로 몰아넣었다.
체코군단 사건은 연합국 특히 미국의 개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체코군단 사태로 보안체계가 취약해진 상태에서 독일이나 볼셰비키가 러시아 내 연합국 측의 군사장비와 보급 품들을 탈취하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그간 출병을 주저하던 미국의 윌슨이 움직였다. 그는 영국, 프랑스의 파병 요구에 동의하여 1918년 7월 군대를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한겔스크에 파병하였다. 월슨은 7월 일본에게 7,000명의 병력 파견을 요구 했다.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시베리아와 북만주의 광활한 지역에 힘의 공백상태가 발생하게 되자 일본 군부는 일찍부터 파병을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7,000명이 아닌 72,000명을 파견하였다. 그것도 다국적군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고 일본이 단독으로 통제하는 군대였다.
-162-163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독립된 모국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체코군단의 일부는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 가지고 있던 무기를 처리하고자 했다. 만주 왕칭현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조선인들의 북로군정서는 이들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교섭에 나섰다. 1920년 여름 조선인들은 소총, 권총, 수류탄, 기관총, 박격포, 탄약 등 1,000여 명이 무장할 수 있는 무기를 싼값에 구입할 수 있었고 이 무기들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사 용되었다.
-166

세력전이이론(power transition theory)가들에 따르면, 국제질서는 세력균형이론가들이 상정하듯 무정부상태라기보다는 사실상의 '위계적' 구조이다. 이들에 따르면 국제 정치질서의 꼭대기에는 '패권국(dominant nation)'이 존재하고, 그 아래 '강대국들 (great powers)'이 위치한다. 나머지들은 '약소국들(middle, small powers)'이다. 문제는 이 강대국들 중 패권국이 구축하고 유지하려 하는 국제질서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는 국가가 있다는 점이다. 이 불만족 강대국이 급속히 국력을 신장하는 경우, 패권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제1차 세계대전도 지역 수준에서의 "선제적 예방전쟁"으로 볼 수 있다. 독일은 러시아가 프랑스의 도움으로 건설하고 있던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되면, 그리고 당시 진행 중이던 군사동원 개혁이 완성되면, 자신의 슐리펜 계획이 무력화되고, ‘2개의 전선'에서 고전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선제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은 세력전이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이 성급하게 일으킨 전쟁, 즉 "현상타파적 패권전쟁"이었다.
-181

러시아의 빠그롬을 지켜보던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은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04년 4월 유대인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계열의 쿤(Kuhn, Loeb & Co.)'의 야콥 쉬프(Jacob Schiff)는 일본은행의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파리에서 만나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제국에게 일본국채 매입을 통해 미화 2억 달러를 조달해주기로 약속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2억 달러가 월스트리트에서 마련되었는데 이 액수는 일본이 당시 필요로 했던 군자금의 절반에 미치는 거액이었다.
전승한 일본은 1905년과 1907년 쉬프를 초청하여 국빈대접을 하며 '서보장'과 '욱일장'을 각각 수여하였다. 그는 메이지 "천황"이 일본 "황궁"에서 직접 훈장을 수여한 최초의 외국인이자 유대인이 되었다.
-237

아이히만은 1962년 5월 31일 람레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끝까지 유죄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형이 집행되기 직전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나는 전쟁과 국기(national flag)의 법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범죄적 동기를 갖고 있지 않은 "놀라울 정도로 매우 정상적(terribly and terrifyingly normal)"이고 평범한(banal), 그리고 전형적인 "공무원(typical functionary)"이었다. 아이히만은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의 보편성을 거부하는 이념적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고, 단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thoughless)" "광대(buffoon)"였거나 "악의 기계의 톱니(cog in the machine)"이었을망정 "사악한(demonic)" 괴물(monster)"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몇 가지 측면에서 비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말대로 아이히만이 아무 생각 없이 인간학살에 참여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가 괴물이 아닌 것은 아니다. 생각 없이 사람을 대량으 로 죽이는 자야말로 괴물인 것이다. 둘째, 아이히만은 그저 "기계의 톱니"가 아니었다. 독일 철학자, 사학자 베티나 쉬탕네스(Betina Stangneth)가 입수한 아이히만의 글과 녹취록은 아렌트가 얼마나 순진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렌트가 접하지 못한 이 130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들에 따르면, 아이히만이 재판 시 진술했던 내용은 사악한 거짓이었다. 그는 붙잡히기 전 네덜란드 출신 전직 친위대(SS) 요원인 빌렘 사센(Willemn Sassen) 등 아르헨티나 나치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은 과거 행적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으며, 자신이 자랑스럽게 행한 일은 독일을 위한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말하였다. 셋째, 아렌트 자신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제
10장과 제11장에서 적시하였듯이, 많은 사람들은 “악의 기계의 톱니"가 되길 거부하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당시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나치가 유대인을 상징하는 별을 덴마크의 유대인들에게도 달겠다고 하자, 자신이 직접 그 별을 달고 다니겠다고 항의하며 그러한 조치를 막았고, 시민들 역시 스웨덴으로 도피하려는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부유층은 스웨덴으로 도피하려는 유대인들의 뱃삯을 대납해주었을 정도로 "악의 기계"를 멈추게 하기 위해 저항했다. (덴마크 유대인 99%가 생존하였다.) 불가리아 지도자들은 나치의 유대인 이송을 지연하기 위해 법령 제정을 고의로 지체하였다. 시민들은 유대인 이송 기차를 막겠다고 위협했고, 왕궁 앞에서 이송 반대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불가리아의 유대인은 수용소로 이송되지 않았다. "악의 기계"가 돌아가고 있을 때, 두 국가의 시민들은 "악의 기계의 톱니"가 되길 거부하고, 그러한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다. 그러한 저항의 결과는 적어도 그 국가에서는 "악의 기계”의 멈춤으로 나타났다.
-249-250

‘카틴 숲 학살'에 대한 소련의 책임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한 장본인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였다. 그는 '글라스노스트(정치적 토론에 대한 개방성 확대)' 차원에서 1990년 4월 13일 소련을 방문한 폴란드 대통령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에게 관련 비밀문건의 일부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건넨 문건에는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이 직접 개입한 사실이나 범죄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지 등은 적시되어 있지 않았다.

옐친은 1992년 10월 15일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이 학살에 직접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고 비난하며 폴란드 대통령 레흐 바웬사에게 비밀문건을 추가적으로 전달토록 하였다. 이 소련 공산당의 문건에 따르면, 인민내무위원부(NKVD, KGB의 전신) 위원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1940년 3월 5일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교화될 가능성이 없는 소련의 적"인 25.700명의 폴란드인을 처형할 것을 제안하였고, 정치국원들과 숙의한 스탈린은 "최고형인 총살형"을 집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소련사가 레베데바(Natalya Lebedeva) 등은 '카틴 숲 학살'은 1920년 소련군의 쓰라린 패배에 대한 스탈린의 앙갚음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독일과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폐기하고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적군으로 하여금 서쪽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길을 빌리자는 레닌의 요구를 거부하고 1772년 이전 국경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진시켰다. 적군은 1920년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레닌은 휴전을 제의했고, 1921년 리가조약이 체결되었다. 스탈린은 이를 민족적 굴욕이자, 갚아야 할 원수라고 생각했다.
-275-276

미국이 '카틴 숲 학살'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4년 해군 장교 조지 얼을 밀사로 정하고 이 사건의 실체에 대해 조사•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얼은 소련의 범행으로 결론짓고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루즈벨트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나치독일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미국 하원은 1951년 9월 18일 '카틴 숲 학살'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위원회인 매든위원회(the Madden Commitee, 위원장 레이 매든 하원의원)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미국 역대 정부는 매든 위원회의 조사결과와 권고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카틴 숲' 문제에 대해 침묵하였다.
-278

(카이로 회담에서) 정상들은 한국의 자유와 독립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당시 수많은 식민지가 있었음에도 유독 한국을 특정하여 합의문에 명기한 데에는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작탄 의거'(1932년 4월 29일)를 매개로 한 중국 국민당 장제스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간의 신뢰와 유대가 있었다.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와 관련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해내지 못한 위업을 한국의 한 청년이 능히 처리했으니 장하고도 장한 일이로다"라고 찬탄한 바 있다. 처칠은 영국의 식민지에도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하며 한국독립 조항 자체를 넣지 말자는 입장이었다. 루즈벨트는 신탁통치가 바람직하다고 보 았다. 결국 정상들은 타협하여 장제스의 주장대로 한국 조항을 합의문에 넣기는 하되 독립의 시기는 못박지 않았다. "3대 강국은 한국(Korea) 인민들이 노예화된 사실을 유념하면서 적당한 시점(in due course)에 한국이 자유로운 독립국이 될 것임”을 확인하였다.
루즈벨트와 처칠은 아시아 문제를 다룬 카이로 회담을 마치고 2차대전 승전전략과 전후처리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스탈린을 만나러 11월 28일 이란의 테헤란으로 갔다. 회담장소로 테헤란을 선택한 이유는 이란의 전략적 중요성과 관련이 있었다. 미국은 이란을 통해 소련에 전쟁물자를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86-287

참패한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1895년 4월 17일 체결)을 통해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고, 랴오둥반도와 포모사(타이완) 및 평후다오 등을 일본에 할양하며, 배상금 2억 냥(당시 가격으로 3억 1천만 엔, 일본 예산의 4배)을 지불하고, 청국의 사스, 충칭, 쑤저우, 항저우의 개항 등을 약속하였다.
일본은 전쟁배상금으로 관영 야와타제철소(현재는 신일본제철이 운영)를 짓고, 방적시설을 확대하며 '일본판 산업혁명'에 탄력을 부여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배상금을 이용하여 당시 선진 열강의 금융 체제인 금본위제도로 편입했다는 점이었다. 청은 배상금을 은으로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총리대신 겸 대장상이었던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배상금 지불 과정에서 영감을 얻어 영국 파운드로 지불할 것을 요구하였다. 청은 어차피 유럽의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파운드로 대출 받았고 일본은 이를 영국은행(Bank of England)에 예치하였다. 이제 일본은 영국은행을 통해 금보유국이 된 것이었다. 일본 의회는 1897년 '통화법'을 통과시켜 일본을 국제금본위제에 공식 편입시켰다. 일본은 국채발행 등을 통해 경화를 차입하고 외국인 직접투자도 순조롭게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행과 영국은행 간의 협력은 1902년의 영일동맹의 성립에 기여했고, 결과적으로 일본 해군력의 증강을 가져왔다.
-431

1932년 2월 조선의 친일 정객 몇 명이 일본 이민당국과 협의하여 '간도에서의 조선인 자치'를 제시하며 실행기구로서 민생단이라는 정치조직을 만들고 "민족의 이름"으로 중조연합항일전선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세우면서 5족협화(만주국을 구성한 만주족• 한족 몽고족 일본인 조선인의 민족적 화합)"의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 민생단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민생단의 출현에 긴장했던 중공 동만특위는 이 조직에 참여 했던 조선인들 색출 작업에 나섰다. 이들이 중국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당에 침투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민생단의 적발과 숙청에는 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대중들도 참여하였다.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애꿎은 조선인들을 막무가내로 처형하였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인물 중 하나는 김일성이었다. 코민테른이 중공당 하얼빈시 서기 웨이정민을 동만에 급파하여 개입함으로써 마녀사냥의 광풍이 잠재워졌지만 동만 지역 조선인들의 피해의식과 민족적 적개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김일성은 조선인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 이 문제를 자주 언급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반제 통일전선 전략'을 수용하여 항일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1937년에는 병력의 규모가 4만에 달하였고,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조선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연군은 일본의 군사작전 강화로 1940년부터 약화되었고, 김일성 등 조선인 병사들은 1940년 12월 소련의 연해주로 피신하였다. 이들 조선인 병사들은 1942년 8월 소련 극동군의 지도하에 소련극동전선군 제88 독립보병여단에 편입되었는데 김일성은 ‘조선인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445-446

미국은 한국의 임시정부가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아니라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은 "[반공주의적] 임시정부를 승인하면 향후 미소관계가 복잡하게 될 것이라 우려"하였던 것이다. 미국은 국민당 정부에게도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말고, 전후 한국 상황에 신축적으로 대할 것을 권고하였다. 미국이 전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추후 한국과 한국인들은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인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470

미군은 한반도 남쪽을 접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절대 다수 조선인들은 일본 식민지배의 질곡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준 미군을 학수 고대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영어강좌, 영어회화 강습소가 생겨났다.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의 어린이들도 미군 환영의 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미군 환영의 열기에 냉수를 끼얹은 것은 비행기로 살포된 1945년 9월 2일 자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조선 민중에게 고하는 포고'였다. 며칠 뒤 2차대전의 영용 맥아더 대장이 발표한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란 '미국 대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 포고 제1호'도 실망한 조선인의 심정을 어루만지 주지는 못했다. 포고 제1호는 오해의 여지 없는 분명한 연어로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했다"고 천명하였다. 맥아 더 장군의 포고 제2호는 더욱 으스스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연합군에 적의 있는 행위를 한 자는 군사점령법안의 재판에 의하여 사형 혹은 그 법정이 결정하는 기타의 처벌을 당한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대조적으로 이미 8•15광복 이전에 북한에 진주한 소련의 '붉은군대 사령부'가 '조선인민에게 고한 메시지'는 화끈한 수사들이 춤추고 있었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란 말로 시작된 8월 20일자 소련 점령군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Chistiakov)의 포고문은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일제의 총독부 공문 같은 악문으로 번역된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미군 사령관의 '점령군'으로서의 포고문과 일제의 압제에서 풀려난 조선인의 심정에 어필하는 소련군 사령관의 '해방군'으로서의 포고문. 미•소 양군 사령 관이 조선인에게 띄운 첫 메시지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정치적 신조나 이념적 확신을 넘어 상당수의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의 마음을 '좌우케' 하는 데 적지 않이 기여했지 않았나 생각된다.>
-471-473

새 결의안이 채택된 10월 7일 당일 미 제1기갑사단의 정찰중대가 38선'을 넘었다. 마오는 이를 자신의 경고와 배려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간주했다. 마오는 UN 군의 진격을 중국 공업의 심장인 만주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남만주는 중국 전력의 1/3을 생산하였다. 선양에는 2,000여 개의 기계생산 공장들이 밀집하였고, 안산과 번시는 중국 강생산의 80%를 차지했고, 푸순은 최대 석탄 산지였다. 이 모든 공업중심지들이 압록강으로부터 200km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제가 건설한, 그리고 중국과 북한이 나눠 쓰는, 아시아 최대 수풍수력발전소 등 몇 개의 발전소들이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못지않게 우려되는 것은 미군이 북한을 정복하여 국경에서 중국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마오는 10월 8일 참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공식명령서에 서명하였다.
10월 1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는 반혁명분자 척결을 위한 전 국가적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류샤오치의 보고에 따르면, 71만 명이 처형되었고, 129만 명이 투옥되었으며, 123만 명이 연금형에 처해졌다.
-547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원하였기 때문에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서명할 의지가 있었다 해도 그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UN군 사령관에게 이양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서명 자격에 관한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었다. 정전협정은 군사적 합의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UN군 사령관을 통해 정전협정에 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는 대한민국의 군통수권자의 강력한 정전 반대 의지를 감안할 때 합리적 해석이라 할 수 없다.
-574

중국인민해방군은 "서장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하기 위해(당시 티켓에 거주하는 서구인은 6명이었다)" 1950년 10월 7일 티벳을 침공하여… 중국군은 티벳의 사원과 종교적 유물을 파괴하였고, 수백 명의 승려들을 살해하였다. 티벳 당국은 황급히 인디아, 영국, 미국 등에 외교적 도움을 청하였다. 미국 등은 엘살바도르의 이름으로 UN에 이 문제를 상정하였다. 중국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서진하였고, 16세의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가초는 인디아의 접경지역인 야퉁으로 피신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티벳 문제의 UN 상정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사가들은 당시 영국은 중국의 시장에, 미국은 한국전쟁에 각각 매몰되어 있어 티벳 문제에 개입할 의지나 이익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든 군사적, 외교적 수단을 상실한 티벳은 할 수 없이 1951년 4월 중국이 제시한 '17개조 합의'에 서명하였다. 내용은 중국이 티벳의 정치체제를 용인하고, 티벳은 중국의 군사점령을 인정하며 외교권을 중국에게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1959년 3월 수년 동안 쌓인 티벳인들의 울분이 폭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를 중국군 부대로 초청하면서 호위대 대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라싸의 시민들은 중국 당국이 달라이 라마를 납치한다고 믿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전인 노불링가를 에워쌌다. 항의가 봉기로 이어졌고, 유혈투쟁으로 비화하였다 . 라씨를 빠져나간 달라이 라마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디아로 망명하여 서북부 작은 고을인 다람살라에 터를 잡고 티벳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1959년 티벳 봉기의 배경에는 CIA가 있었다. CIA는 1958년 봉기를 배후에서 기획하였고, 항공기를 통해 일단의 무기를 티벳에 공급하였다. 달 라이 라마의 인디아 망명도 CIA의 기획과 지원에 따라 이루어졌다. 미국은 봉기 직후 티벳인들의 유기훈련을 위해 미국 콜로라도 주에 훈련기지(Camp Hale)를 마련하였다. 176명이 여기서 훈련을 받았다.
-582-583

미일관계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존 W. 다 우어(John W. Dower)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특징 및 문제점을 몇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일본과 오키나와의 분리이다. 미국의 행정권하에 들어간 오키나와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시기 B-29 폭격기의 발진기지로 활용되었다. 둘째, 일본의 사실상의 재무장을 허용한 미일안보조약은 재무장을 금지한 일본의 헌법을 무시함으로써 일본군이 아시 아에서 저지른 전시악행을 축소·부정하는 결과를 야기하였고, 일본의 우익 정치인 들이 안보조약을 가지고 헌법을 고치려는, 이른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wag the dog)" 정치공학적 애국주의 정치 풍조를 격려하였다. 셋째, 샌프란시스코 조약들은 일본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재무장을 촉진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와 관련된 “역사문제"가 은폐·축소·왜곡되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넷째, 미국은 일본이 과거에 대해 반성 하고 주변국들과 협력하며 아시아에서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자신에게만 충실한 정치외교적, 군사적 대리자 또는 순종적인 "피후견국가(client state)"로 남도록 하였다. 일본은 후견국의 힘을 대리로 사용하여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피후견국이라는 지위는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유연한 정책을 택하거나, 대국적인 정책을 취할 모든 가능성을 가로막기도 하였다. 다섯째, 샌프란시스코 조약들은 일본이 강탈한 영토를 반환하는 문제에 대해 역사나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냉전기 미국의 국가이익의 차원에서 접근하도록 함으로써 분쟁 과 갈등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588-589

미국과 UN이 한반도 전체에서 "유일하고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한 한국이 초대받지 못한 것은 미국의 냉전전략, 미국의 이승만 정부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일본의 집요한 방해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초대받지 못하는 상황이 야기할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1947년 말의 국무부 초안에 따르면 미국은 연합국이 아닌 인도네시아와 한국을 초대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미국의 이러한 정치적, 윤리적 고려는 그야말로 고려에 머물고 말았다. 덜레스는 1951년 초 회의 초청을 잠시 고려하기도 했으나 일본, 영국 등과 의견을 교환한 후 초대 불가로 입장을 정리하였다. 한국이 초대받지 못한 실제 이유는 미국의 대소냉전전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군정종식이 지연되거 나 평화조약이 징벌적으로 인식되는 경우 일본인들의 반미주의가 폭발할 것으로 우려했다.
-590-591

을사늑약은 이미 체결 당시부터 국제법학계에서 무효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906년 프랑스 파리대 법과대학 교수 프란시스 레이(Prancis Rey)는 1905년 한일 간 조약이 협상 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 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조약문의 첫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전권대사의 인격에 대하여 행사된 강박은 조약을 무효로 하는 동의의 하자에 해당된다는 사법상의 원리가 공법에도 적용된다"고 적었다. 그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905년 조약(1905년 11월 17일)이 1904년의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와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하였다.
1927년 미국 국제법학회는 하버드 법대에 국제조약법 제정에 따른 법률안 기초를 의뢰하였다. 48명의 저명 국제법 학자들은 1935년 국제조약법안에서 "조약 성립의 본질적 조건은 '당사자 간의 자유의사에 의한 동의'이며, 강박이 허용되는 유일한 예외는 승전국이 패전국에 부과하는 평화조약뿐이고 국가 간 조약은 평등 의 원리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하며, 공포에 의해서 동의가 조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였다. 『하버드 보고서」는 강박을 사용하여 늑약한 사례로 다음과 같은 조약들을 예시하였다:
1. 1773년 러시아군이 폴란드 의회를 포위하고 체결한 폴란드 분할조약
2. 20세기 초 대표적인 예로서, 이미 몇 차례 인용된 바, 일본의 전권공사가 일본군 을 동원하여 1905년 11월 17일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에게 가한 강압
3. 1939년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를 [나치]독일의 보호 하에 두는 조약에 체코 대통 령 및 외무장관이 서명하도록 하기 위해 가해진 고문 등.
1963년 UN국제법위원회는 1905년 한일 간 조약이 대한제국 황제와 내각에 대한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으므로 국제법적으로 성립되지 않은 조약이라고 UN 총회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2년 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는 이 UN 국제법위원회 보고서의 판단과 정신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614-615

모든 공화당 의원들이 매카시의 행보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일한 여성 상원의원이었던 메인 주의 마가렛 스미스(Margaret Chase Smith)는 1950년 6월 1일 이른바 '양심선언'을 발표하였다:
“품위가 있어야 할 상원이 면책특권이라는 방패막이 속에서 증오와 인성파괴의 토론장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공화당이 '공포, 무지, 편협, 비방'의 네 마리 중상모략의 말을 타고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스미스는 15분간의 연설을 마치고 '양심선언문'을 의회기록으로 등재하였다. 스미스와 그의 동료 공화당 의원 6명이 이 문건에 서명하였다. 이 문건에서 이 의원들은 "우리는 공화당원이기 전에 미국인이다…매카시주의의 전체주의적 정치기법이 방치될 경우 우리가 지금까지 정성을 다해 지키고 가꿔온 미국적 생활방식은 파피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많은 상원의원들은 당시 지배적인 반공적 분위기에서 이러한 직설적 비판이 공화당 의원에 의해 제기된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원로 정치인 버나드 바루크는 "스미스가 한 말을 남성이 했다면 그는 차기 대통령감이다"라고 말했다.
매카시는 1951년 스미스를 자신이 위원장인 막강한 '상설조사소위원회'에서 물러나게 하고는 그 자리에 몇 달 전 처음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반공투사이자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인 리처드 닉슨을 기용하였다.
-632-633

가톨릭 교도인 지엠은 가톨릭 교회나 신자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베트남 국민의 70-90%를 차지하는 불교도들을 국가와 사회에 포용/통합하는 데 소극적으로 임함으로써 정치적 불안정과 인권 탄압의 악순환을 야기하였다. 지엠은 집권 후 모든 주요 공공건물에 교황청의 깃발을 게양하도록 하였고, 1959년에는 베트남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였다. 그는 정부 내 모든 고위 권력직에 가톨릭 교도들을 우선적으로 임명하였다. 불교도들은 분노하였다. 특히 적지 않은 가톨릭 교도들이 과거 프랑스 식민정권에 부역했다는 점이 더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 및 1960년대 초 남베트남에서 불교 조직이 급성장하였다. 그 결과 불교도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의식화되고 지엠 정부에 대해 비판적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1963년 5월 발생한 지엠 정권의 불교도 탄압은 종교박해 그 자체의 의미와 함께 정치적 그리고 군사전략적으로도 다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681

1963년 봄 승려들은 공개적 소신공양으로써 지엠 정부에 항의할 것임을 암시하기 시작했다. 6월 11일 대승불교 승려 틱꽝득이 사이공 시내 한 복판에서 분신하였다. 틱꽝득의 분신을 촬영한 미국의 AP 통신사의 맬콤 브 라운은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의 검열이 실시되기 전이라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을 "비둘기”(정기적으로 비행기를 타는 승객으로서 부탁받은 물건이나 편지를 목적지까지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다)를 이용하여 마닐라로 보냈고, 이어서 무선으로 AP 본부에 전송할 수 있었다.
화염 속에서도 표정의 일그러짐 없이 정좌자세로 조용히 죽음에 이르는 의연한 한 고승의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의 전화통화 중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하느님 맙소사"를 연발하였다. 그는 "역사상 이처럼 전 세계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뉴스 사진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엠은 오히려 8월 계엄을 선포하여 강제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지엠의 동생 응오 딘뉴에게 충성을 바치는 남베트남 특수부대는 사이공과 후에 등 남베트남 전역에서 불교도들을 탄압하고 불교 파고다들을 훼손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응오딘뉴의 처이자 불교에서 개종한 가톨릭 신자인 "마담 뉴" 썬레쑤언은 미국 언론과의 TV 인터뷰에서 틱꽝득의 죽음을 "땡중의 바베큐 쇼"라고 비난하였다. 응오딘뉴 자신은 "땡중들이 계속 분신을 한다면 기꺼이 휘발유와 성냥을 제공하겠다"며 조롱하였다.
-682-683

특기할 만한 것은 바티스타 정권과 미국 마피아 간의 공생관계였다. 그는 수많은 이권을 마피아에 넘겨주고 대가로 정치자금을 수수하였다. 바티스타는 사탕수수 농장 대부분을 미국 자본에 넘겨주었고, 국 제전신전화회사(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 ITT)가 쿠바의 전신/전화 사업을 지배하도록 하는 등 쿠바 경제가 미국에 종속되도록 방치하였다. 그는 쿠바의 무기공급원도 미국에 한정하여 미 방산업체에게 독점시장을 제공하였다.
-862

법무장관인 로버트 케네디는 대통령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진주만 공격을 계획할 때 도조[히데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던 것같이 비겁하고 불법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었다. 미국의 쿠바에 대한 기습공격을 "진주만 공격과 같은 행동"이라고 규정하며 반대했던 최초의 인물은 국무차관 조지 볼이었다.
10월 18일 회의에서 합참은 외과폭격을 정식으로 제안하였다. 로버트 케네디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대통령에게 "조지 볼의 말이 맞 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후 결국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가 되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볼은 "우리가 평생 카인의 징표를 이마에 붙이고 살 수 있겠 습니까?"라고 거들었다. 볼은 이미 "미국이 일본인들을 기소한 이유는 그들이 기습을 했기 때문임. 미국이 일본과 똑같은 행위를 한다면 이는 미국의 전통에 위배될 뿐 아니라 문명국에 대한 배신 행위가 될 것임"이라는 내용을 담은 메모를 대통령에게 제출한 바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카인의 징표를 평생 달고 다니는 일은 엄청나게 괴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볼을 지지하면서 "우리는 쿠바를 이미 공격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5년간 미국에 대한 소련의 선제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약소국에 선제공격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기습은 미국적 전통에 위배되며, 결국 선전포고 없는 "진주만 기습의 미국판"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이후 대통령은 애치슨을 따로 만나 로버트 케네디의 도덕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애치슨은 도덕론은 "쓸데없는 소리"라며 외과폭격이 최선책이라 건의하였다.
대통령을 진정 압박한 군인은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이었다. 케네디가 비밀리에 녹음한 당시 상황은 대통령과 공군참모총장 간의 그야말로 "계급장 떼고 벌인 설전"이었다. 대통령은 의전비서관 케네스 오도넬과 특별보좌관 데이브 파워즈에게 한마디 했다: "이 별을 단 놈들은 하나의 큰 이점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아서 그놈들이 틀렸음을 얘기해 줄 수 없다는 점이야.”
-887-889

우크라이나 출신 도브 베르 보로초프는 마르크스주의와 시오니즘을 결합하였다. 그는 1905년 집필한 『민족문제의 계급투쟁』에서 "민족문제는 국제경쟁에서 비롯된다. 국제경쟁은 자본주의 경제의 결과이다"고 지적하며 유대인 문 제라는 민족주의 문제는 자본주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주장하였다. 베로초프와 초대 이스라엘 총리가 된 폴란드 출신 벤-구리온이 이끈 이 사회주의 시오니즘은 민족해방과 계급투쟁을 팔레스타인이라는 땅을 매개로 결합시켜 과거 비생산노동(예를 들어 고리대금)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을 이제 팔레스타인에서 삽과 낫을 들고 노동하는 민족으로 개조하고자 하였다. 유대인 집단농장인 키부츠도 이러한 사고에서 도출된 결과물이었다. 베로초프와 벤-구리온의 사회주의 시오니즘은 향후 이합집산을 거쳐 이스라엘 노동당으로 발전했다.
-928

미국이 이스라엘을 승인하자 3일 후 소련도 승인하었다. 당시 스탈린은 세력권이 상당 부분 김치는 영국이 소련의 최대 경쟁국이라 보았고, 러시아 출신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보로초프의 후계자들인 사회주의 시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이스라엘의 건국은 영국에 부담을 주며 중동지역에서 갈등을 일으켜 영국의 지역패권을 마모시킬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소련의 위성국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 냉전이 시작되던 당시인 1947년 3월 미국이 그리스와 터키를 방어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의 선포는 소련 국경 쪽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됨을 의미했고, 이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포위망을 뚫는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보게 만들었다.
소련은 서방국가들이 이스라엘에 무기판매를 금지하고 있던 1948년 1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를 활용하여 무기(2차대전 중 독일군이 사용하던 것으 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남아 있던 무기)가 유대인 민병대에 반입되도록 협력하였다. 소련은 또한 20만의 동유럽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963

미국 상원은 특위를 구성하여 정보활동과 관련된 미국 정부의 공작에 대해 조사에 나섰다. 일명 처치위원회라 불리는 이 상원특위는 110,000건에 달하는 방대한 문건을 검토하고, 수많은 인터뷰와 166회의 청문회를 실시한 후 "비밀작전은 있었고, 미국이 아옌데의 집권을 막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하기는 했으나, 미국이 피노체트 쿠데타와 직접적 관계가 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2013년 비밀해제된 문건들에 따르면, 피노체트 쿠데타는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대통령 닉슨을 설득한 결과였다. 키신저는 아옌데가 대통령에 선출된 지 8일 후인 9월 12일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와 통화하면서 "우리는 칠레가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 했고, 헬름즈는 "동의한다"고 호응하였다. 이들이 통화한 지 3일 후 닉슨은 “칠레의 경제가 비명을 지르도록" 압박하라고 지시했고, 비밀작전의 수장으로 키신저를 임명하였다.
-1018

사가들은 소련의 결정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왔다.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 이후 중앙아시아 위성국들에 대한 통제력 유지는 소련의 권위와 관련된 핵심이익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고, 전 세계 차원의 대전략(grand design)의 일환으로서 사회주의 세력 유지가 소련의 국익이라는 주장도 유사한 맥락에서 개진되었다.
파키스탄의 힐랄리(A. Z. Hilali)에 따르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주의가 확산하여 중앙아시아 제 공화국들에 대한 통제력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의 호메이니식 원리주의 이슬람혁명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냉전 직후 비밀해제된 소련 문건에 따르면 소련은 '이슬람주의화한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이란 및 (미국의 동맹국) 파키스탄과 연합하여 자신에게 적대행위를 할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였다. 그렇게 되면 소련의 남부국경이 위험해지고, 나아가 미국이 구축하고 있는 대소포위망(동남부의 중국, 남부의 아프가니스탄 이란•파키스탄, 그리고 서부의 서유럽국들로 구성되는)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우려스러웠던 부분은 1950년대 터키에 배치되었던 것처럼 미국의 미사일이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1040

미소 간 교류• 협력 과정을 주도했던 소련 측의 주체들은 '나이 들은 신세대' 지식인들이었다. 중심적 연구기관으로서 1956년 소련과학원 소속으로 재정립된 '세계 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와 1967년 미국통 아르바토프(Georgy Arbatov)의 주도에 의해 역시 과학원의 일부로 설립된 '미국•캐나다연구소(ISKRAN)’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 각각 800명, 400명의 전문연구원을 보유하였다.
서방의 지식인들도 소련의 신세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의 관념적 구조와 그 성격을 바꾸어 나가고자 하였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오슬로의 평화연구소, 서독의 사회민주당 외교연구원 등이 앞장섰고, 스웨덴 정부가 지원하는 '팔메위원회'는 안보는 공공재(public goods)라는 인식하에 '공동안보(common security)'라는 새로운 안보개념을 고안해냄으로써 데탕트의 동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소련 신세대의 상당수는 외교안보 영역에서 이른바 '인식 공동체(epistemic community) 또는 전문가 공동체(expert community)'를 이끄는 주체들이었다. 한 사회의 거대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아이디어는 정치적 어젠다가 되고 어떤 아이디어는 채택되지 않는지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아이디어가 선택되는 정치적 과정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러시아 전문가 멘델스존(Sarah E. Mendelson)에 따르면, 아이디어가 실현되고 인식 공동체가 영향력을 가지려면 지도부에 대한 접근권, 지도부에 대한 아이디어의 중요성, 그리고 정치적 어젠다를 통제할 수 있는 지도부의 능력이 필수적이다. 소련의 외교안보 '인식 공동체'를 주도하던 신세대는 1980년대 중반 이 세 조건을 다 만족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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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로서는 콜에게 압박을 가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 부대표였던 오스카 라퐁텐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콜이 [통일]독일이 NATO에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틀렸다"며 자신은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 내의 유럽방위체제를 선호한다고 말하였다. 부시는 다 수의 서독 국민들이 통일독일이 NATO에 남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퐁텐이 집권하게 되면 미군이 독일에서 철수해야 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1990년 6월 8일 콜과 부시는 백악관에서 회동하여 통일독일이 NATO에 남을 것임을 재확인하였고, 이를 기정사실화하고자 했다. 콜은 통일을 위해서는 미국의 물질적, 비물질적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미국이 원하는 독일의 NATO 잔류 문제의 해결에 전력을 기울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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