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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에릭 울프. 박광식 옮김 뿌리와이파리. 5/4
홉스봄의 <역사론>에 서평이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마침 국내 번역본이 있길래 바로 주문을 했다.
책은 정말 좋다. 그러나 번역이... 번역이... '괴랄'하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거의 모든 문장이 목에 걸려서 읽기가 느무느무 힘들었다.
이 책에서 내놓는 주요 논증 하나는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사회들 대부분이 유럽 팽창의 결과물이지 앞선 진화 단계들의 순수한 응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산양식 개념의 여러 효용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우리가 이 개념을 이용해 체제 내 관계들은 물론 체제 간 관계들까지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사용해 한 생산양식, 곧 자본주의가 지금의 우위에 오르기까지 다른 생산양식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양상을 밝혀낼 것이다. 우리가 채용한 이 세 양식(친족질서적 양식, 공납제적 양식, 자본주의적 양식)을 사회들을 특정 범주에 집어넣는 데에 쓰는 도식들로 여겨서는 안 된다.
-181
게르만족이 북쪽에서 침입하고 무슬림들이 남쪽에서 쳐들어오면서 로마 속주 이스파니아Hispania의 행정적 결합이 깨지자, 이렇게 해서 남게 된 작은 국가들이 북쪽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이 소국들은 서서히 통합을 해가다가 카스티야 연합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이라는 두 정치단위를 이루게 됐으며, 아라곤 연합왕국은 카탈루냐 공국과 아라곤 왕국을 아우르고 있었다.
카스티야는 무슬림 지배 알안달루스와 싸우며 영역을 넓히다 보니, 군사적 역할만 맡게 돼서, 정복한 땅은 정복을 이끌었던 군사 귀족들에게 큰 덩어리로 떼어 분배했다. 이 결과 15세기 말에는 인구의 2~3퍼센트 정도가 97퍼센트의 땅을 소유했고, 다시 이 땅의 대부분이 소수 가문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카스티야 땅에서 지배적 산업으로 자리를 잡는 것은 메리노 양모 생산이었으며, 이 양모는 네덜란드에서 직물로 완성됐다.
아라곤 연합왕국의 땅들은 카스티야에서보다는 더 고르게 분배됐다. 상업중심적인 카탈루냐는 13세기와 14세기에는 번성하던 상업국이어서 해양 교역상의 연관관계들이 멀리 레반트에까지 닿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15세기에 제노바 상대 경쟁에서 지고 말았다.
카스티야 연합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결합은 한쪽이 크게 기우는 둘을 붙들어 맨 것이어서, 카스티야의 우위가 보증돼 있었다. 이 때문에 이베리아의 이 새 정치단위에서 주도적 역할은 거대한 양 떼들을 소유한 귀족들에게 넘어갔다. 이 귀족들은 양 소유자들의 강력한 조합 인 메스타Mesta로 조직돼 있었다. 카스티야가 확실하게 목축 경제로 옮겨가면서 에스파냐 영역에서는 산업 발전이 억눌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들이 저 군사력 기반 공납수취자들의 지배에 도전할 능력도 약해지고 말았다.
-249-250
다수는 프랑스인이었고 일부는 잉글랜드인이었던 버커니어buccaneer들은 에스파냐인들이 산토도밍고에 내버려둬 야생 상태가 된 소들을 사냥하는 사람들로 시작했는데, 그 이름도 연기를 쐬어 고기를 말릴 때 쓰던 나무를 부킹boucan에서 온 것이거니와, 반은 해적, 반은 용병으로서… 노예 거래나 영국령 온두라스 해안을 따 라가며 로그우드 벌채를 해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버커니어들은 활동 근거지를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으로 옮겨갔고, 여기서 다시 마다가스카르로 건너갔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이들은 리베르탈리아 해적공화국을 세웠다. 프랑스가 파견한 강력한 함대에 밀려 흩어졌다가, 이네들은 마다가스카르 동쪽 해안의 베치미사라카 족이 세운 노예 교역 국가에서 피난처를 구했고, 여기서 원주민들과 손을 잡고 19세기 초까지 해적질을 이어갔다.
카리브 해 주변 이 뒤섞여 있던 세계의 두 번째 구성 요소는 …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들은 미스키토Miskito 족으로,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에 걸쳐 있는 모스키토 해안에 살았고, 또 쿠나Cuna 족이 있었으니 파나마와 콜롬비아에 살았다. 쿠나족은 치브차어를 쓰던 사람들로, 유럽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미스키토족보다 훨씬 복합적인 기술과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326-327
우와, 여기서 쿠나 족을 만나게 되다니!
[구정은의 '현실지구'] 파나마 '게의 섬' 사람들의 기후변화 이주
선물들은 또 선물이라 이름 붙은 물건들은 또한 동맹을 만들어냈으니, 인디언 집단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유럽인들과 인디언들 사이에서도였다. 이 인디언 "민족들" 또는 "부족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중에 정부 관리들이나 인류학자들에게 서로 구별되는 인종적 단위들로 취급되지만, 모피 교역 자체의 확대에 대응하느라 이런 형태들을 갖게 된 것이었으니, 이 확대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능동적인 참여자 였던 것으로 … 역사가 없다고들 생각 하는 이 사람들의 역사는 사실은 유럽 팽창의 역사 자체를 이루는 한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유럽인 교역상들이 자기네의 경제적•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고, 원주민 모피 포획꾼들과 유럽인들 간의 관계는 불균형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의존이 심화되면서 원주민 모피 포획꾼들이나 페미컨 공급자들은 교역에 갈수록 노동을 더 바치도록 내몰렸다. 선대제 속의 특화된 노동자들이 됐던 셈인데 … 이런 식의 특화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륙적 규모에다 국제적 성격도 띠었던 교환망에 더욱 단단히 붙들어 맸던 것인데, 이번에는 동업자가 아닌 종속적 생산자로서였다.
-400-401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백인들의 초기 관계를 묘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아메리카 흑인 노예들의 삶에서도 상대적 자율성과 상호작용,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역동성을 보여주려 애쓴다.
북아메리카의 이 노예 인구는 대체로 자체 인구재생산을 했는데, 서인도제도의 노예 인구들과 대비가 된다. 이미 1680년에도, 나중에 미국이 되는 식민지들에서 태어난 흑인들이 노예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860년이면, 1퍼센트를 제외한 모든 노예가 본토에서 태어났다. 서인도제도와 브라질에서는 끊임없이 수입을 해서 노예 인구를 보충해야만 했다.
…북아메리카 노예들 사이에서 가족들을 이루게 되고 친족망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 추가적 인구 성장을 뒷받침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최근의 연구들은 친족과 의사 친족이 참여하는 연결망들이 노예들 사이에서 어떻게 발달했고 기능했는가를, 또 이 연결망들을 어떻게 이용해서 지식과 신념 체계를 전달하고 정교화하는지를 보여줬다.
노예들은 주인을 상대하는 법을 익혔지만, 주인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내면화했다는 증거 같은 것은 없다. "친족과 의사 친족이 이루는 연결망들이 1840년대와 1850년대에 남부 전역에 걸쳐 노예집단들 내부에 존재했던 것이야말로 노예 체제가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상태를 유지했던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이런 속박들 속에서도, 그날그날의 관계들은 끊임없이 재협상을 해야만 했다.
-559-560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역시.
유럽의 팽창은 아프리카의 기존 교환 회로들에 조화돼 들어갔던 것이어서, 회로들의 기본 구조를 바꾸지는 않고 단지 회로들을 통한 물자의 흐름에 더 보탰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이내 유통 자체 뿐만이 아니라 노동력의 배분에도 영향을 줬다. 유럽인들이 자기네가 가져오는 물건들의 대가로 사람들을 요구하게 되면서 바로 생산과 관련된 관계들의 성격 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주 드물게만 유럽인들은 노예를 잡는 데에 직접 손을 댔다. 대신 유럽인들이 의존했던 것은, 아프리카인 "왕들이나 부자들, 대상인들"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이 협력을 하면서 이미 있던 국가들은 더 강해졌고 국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던 지역들에서는 국가가 형성되도록 자극했다.
-423
아샨티라는 정치단위는 열대우림 지대에 있는 핵심지에서부터 뻗어 나가서 남쪽으로 해안과 내륙 쪽으로 사바나 양쪽에서 땅들을 차지했다. 또 다른 정치단위가, 곧 요루바족의 오요 왕국이 트인 초원 지 대에 있던 핵심지에서 두 방향으로 팽창해서, 북쪽에서는 나이저 강을 끼고 있던 누페Nupe 족한테서 공납을 받아내고 남쪽에서는 새로 생긴 항구들에서 유럽인들과 접촉한다. 서쪽으로는 아샨티의 열대우림 지대가 자리 잡고 동쪽으로는 나이저 강까지 펼쳐진 열대우림 지대가 있는 그 사이로, 넓은 사바나 개활지가 세로로 이어지면서 해안까지 다다른다. 여기서 이 오요라는 국가는 우림 지대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기마 부대를 전개할 수 있었다. 북쪽 하우사족에게서 말을 사들이면서, 오요의 통치자들은 1550년 즈음 팽창하기 시작했고… 말에 대한 의존은 나중에 드러 나지만 오요에게는 강점의 근원이자 약점의 근원이었다. 오요 현지에서는 말 번식이 체체파리가 성해서 쉽지가 않았고, 말을 계속 북쪽에서 들여와야만 했으며, 이 말의 대금을 치르느라, 오요의 통치자인 알라핀들은 물자가 끊기는 일 없이 북쪽으로 흘러가게 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오요 왕국은 주요한 노예 납품자가 됐다.
-435-436
아프리카는 오랫동안 코끼리 언니를 아시아 시장들에 공급해 오던 터였으나 18세기에 유럽 사람들이 중국식 또는 인도식 미적 취향에 맛을 들이게 됐고… 프랑스인들이 노예들을 구해 레위니옹과 모리셔스 같은 인도양 쪽 섬들의 새 재식농원들로 보내려 했던바, 마다가스카르의 노예포획 왕국들한테서 또 동아프리카 해안에 들어선 무슬림 항구 도시들의 노예상들한테서 사가는 노예가 점점 많아졌다. 영국이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하면서 서아프리카 쪽 노예 공급지들에 간섭을 했고, 그리하여 브라질이나 쿠바 쪽의 노예상들이 새 노예들을 찾아 동아프리카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동시에, 오만의 아랍인들이 잔지바르에 정향 재식농원들을 세웠는데, 자기네 새 사업체들을 돌릴 노예들을 가까운 아프리카 해안에서 사들였다.
이런 새로운 상업상의 기회들은 상아며 노예 교역에 잔지바르의 오만 출신 아랍인들, 해안 쪽의 무슬림 스와힐리족 상인들까지 끌어들였다. 이들 새로 뛰어든 집단들은 무장 대상단들을 조직하고 내륙 지역에 요새들이며 교역소들을 세웠다. 점차 화기를 갖춰가면서, 이 집단들은 현지에서 유력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어떨 때는 아프리카인 수장들과 동맹을 맺었고 어떨 때는 드러내놓고 갈등을 빚었다.
-463-464
이어지는 내용은 아프리카의 '불편한 진실'.
이 문제는 여러 면에서 많이 생각해봤지만 드러내놓고 말하기엔 참 힘든. 특히나 '백인'들은 말이다.
칼 폴라니도 다호메이 얘기 썼다가 비판을 거세게 받았다니 말이다. 그 시절엔 더 그랬겠지만.
노예 거래는 일종의 노동 분업을 낳았으니, 이 분업체제에서 노예를 포획해 건사하고 육로로 이동시키는 일은 아프리카인들의 손에 있었고, 유럽인들은 노예들을 대양을 건너 운반하고 "훈련"시켜서, 곧 길들여서 최종 유통시키는 일을 맡았다. 노예무역은 사람들을 사는 쪽과 사람들을 공급하는 쪽의 적극적 협력에, 또 양쪽에서 나눠 하는 활동들의 정교한 통합에 의존했던 것이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노예상인들과 이네들 덕에 이익을 본 사람들이 쓴 역사는 오랫동안 아프리카 쪽 과거를 지워버렸기 때문으로, 여기서 묘사하기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야만인으로서, 유럽인들에게 이끌려서야 문명의 빛을 보게 됐을 따름이었다.
더 가까이로 와서, 아프리카 역사를 놓고 다른 접근법이 -이번에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제시되는데, 여기서는 아프리카의 군사적•상업적 지배집단들이 같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에 관여했던 사실을 부정한다.
-466
나이지리아 중부 지역은 노예 거래지로서 북쪽의 이슬람 수장국들이 또 해안 쪽에서 오는 노예상인들이 노예들을 구해 갔다. 이 지역의 남동쪽으로 이보 igbo 땅이 놓여 있었으니, 노예 포획에 같이 시달리다 보니 친족 기반 집단들에게 공통의 "부족적" 속성이 부여됐고, 결국 오늘날의 이보족이 된다. 노예 포획 집단들이 목표로 삼던 또 다른 지역은 오늘날의 앙골라와 자이르, 잠비아의 경계 지대로서, 이 지역에 살던 남룬다 Southern Lunda 사람들 중에서도 은템부 족이 인류학 저술들을 통해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된다.
1400년 이후의 유럽 팽창은 이 대륙을 이제 지구적 규모의 거래 속으로 끌어들였다. 아프리카인 노예들 수요는 대륙 전체의 정치경제를 다시 빚어놓았다.
새로운 공납제적 국가들이, 또 노예 포획자들의 특화된 조직체들이 나타나게 됐고, 인류학자들이 "우두머리 없고 분절적이며 종족에 기반을 두었다"고 묘사하는 사회들은 노예 포획자들의 주요 표적 집단이 됐다. 그러므로 이 서로 다른 결합구조들은 유형학적으로 분리 가능한 국가들로 또는 역사 없는 사람들의 "부족들"로 이해될 수는 없다. 이 결합구조들은 차라리 어떤 단일한 역사적 흐름이 낳은 여러 결과들이라 하겠다. 유럽 역시도 그 발전과 팽창에서 아프리카가 수행한 의할을 파악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468-469
백단나무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동식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재미있다.
아편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지만, 유럽인들은 중국인들이 갖고 싶어하는 다른 자원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려고도 혈안이 돼 있었다. 이런 자원들 가운데 하나가 백단나무 sandalwood 였는데, 여기서 나오는 기름을 중국인들은 향을 만들 때 썼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이 백단나무를 얻는 데에 이용됐으며, 나무를 씨를 말리는 지경까지 갈 때도 많았다. 피지 섬에서 나무를 다 베어내가는 것이 1804년부터 1810년 사이였고, 마르케사스 섬은 1804년에서 1818년 사이, 하와이는 1811년에서 1830년대 중반 사이였다.
19세기 중반 즈음에는 원주민들을 계약을 맺고 고용해서 뉴칼레도니아 섬이나 뉴헤브리디스 섬에서 백단나무를 베게 했다. 보수로 원주민들이 받은 것은 철제 도구며 철물, 직물, 담배와 담뱃대가 있었고, 소총과 화약을 받기도 했다. 교역상들은 다른 섬들의 원주민들이 생산한 물품들로도 대가를 치렀고, 그리 하여 섬들 사이 교환을 더 심화시켰다. 피지나 리푸 섬, 타나 섬은 다른 섬들에 돼지들을 대줬다. 타나 섬에서는 돼지들과 바꿀 것으로 솔로몬제도의 거북 등딱지를 원했고, 에로망가 섬은 뉴칼레도니아의 눈푸리nunpuri 조개껍데기를 요구했으며, 에스피리투산토 섬과 에로망가 섬은 백단나무를 주고서 돼지들이나 조개껍데기, 거북 등딱지, 고래 이빨을 받았다.
중국에서 수요가 있던 또 다른 상품은 해삼이었다. 이 상품은 오랫동안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뱃사람들이 공급했으나, 이제 유럽인 교역상들이 교역을 직접 조직하기 시작했다. 해삼을 채취해 처리하는 일에는 상당한 노동량이 들어갔다. 평균 크기의 처리장 하나면 300명 남짓을 두고서 이 바다 동물을 말리기 위해 씻고 땔나무를 해오는 일에 매달리게 했다.
백단나무를 베어다 팔고 해삼 교역을 하고 한 일은, 거기에다 고래잡이까지 심해지면서, 이 남쪽 바다들 전역에 화기들이 퍼지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유럽인들의 교역에서 자극을 받아 꽤 많은 섬들에서 소규모 국가들이 수립됐고, 유럽 무기를 보유한 강력한 수장들이 이 국가들을 이끌게 된다.
-519-521
인도와 우간다.
면사와 면제품들은 중국으로 보내는 물품들 가운데서 오로지 아편에만 뒤졌고, 아편 교역이 쇠퇴하고 난 뒤로는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다. 인도 상인들이 아편 교역과 면제품 교역에 참여하면서 인도인들의 수중에 부가 쌓일 바탕이 마련됐고, 직물 산업이야말로 인도에서는 유일하게 "그 탄생과 발전이 국내 자본과 국내 사업가들이 주도해 이루어진" 산업이었다. 이런 독자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중국에서 잉여를 추출해낼 때 인도가 일종의 중계국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도 직물 산업은 계속 확대되다가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중국 시장을 놓고 일본과 경쟁을 하게 된다.
봄베이는 1665년에 영국 국왕에게 넘어간다. 교역 항구로서 봄베이의 중요성은 처음에는 수라트나 브 로치에 가려 있었으나, 곧 통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디우에서 또 수라트에서 상인들이 이주를 해오고 이와 함께 파르시족 거류지가 커지면서였다. 1800년이면 봄베이는 인도 서부의 주요 항구가 돼 있었으니, 아편과 원면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설탕과 금속 제품들을 수입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이면, 봄베이는 영국 제조품들이 아시아로 풀려나가는 주요 배급처로 동시에 유럽으로 가는 단섬유종 원면을 환적하는 대표적인 중계항으로 성장한다.
-572-573
(인도 직물산업의) 쇠퇴의 이유는 외부 경쟁이었으니,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로 자체 직물 산업을 일으킨 터였다. … 직물 산업은 또한 인도에서 면화 경작 면적이 확대되도록 자극을 했으니, 특히 봄베이-신드, 베라르, 하이데라바드에서였는데 … 추가로 면화 경작지가 필요해지자 면화 필요분에서 상당량을 영 국 제국의 다른 속령들에서, 특히 우간다에서 구했다.
-577
1840년 이후로는, 차가 다른 곳에서도 대량으로 재배되기 시작하는데, 먼저 아삼Assam 으로, 차가 야생 상태로 자라고 있었고, 또 인도 다른 여러 지역들이 있는데, 차를 심은 경우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나서는, 증기선이 차의 선적이며 운송에서 클리퍼선을 누르게 됐고, 인도산 "흑"차가 중국산 녹차보다 상업적으로 우위에 서기에 이르렀다. 실론에서는 차 재식농원들이 1870년대에 놀랄 만큼 빠르게 고지대 전역에 들어서는데, 상당 정도는 칸디의 신할라Sinhala 족 소농들을 희생시켜서였다.
차 경작은 대단히 노동 소비적이다.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재식농원주들은 타밀어 사용자들을 남인도에서 실론으로 들여왔다. 이 인도 타밀족과 신할라족 소농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대립은 언어와 종교가 또 달라서 더 심화됐다. 신할라족은 인도유럽어를 쓰는데 타밀족은 드라비다어 사용자들이며, 신할라족은 불교도들인데 타밀 족은 힌두교도들이다. 이런 차이들이 다시 불씨가 돼서 신할라족 경작민들과 타밀족 재식농원 프롤레타리아들 사이에서는 노골적인 충돌들이 계속 일어났다.
-668-669
코코아는 원래 메소아메리카산 작물이었다. 17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네덜란드인들이 코코아를 서아프리카 해안 기니 만의 상투메 섬으로 들여왔다. 1879년에 한 진취적인 가Ga어 사용자가 코코아 씨를 가져다 아쿠아핌 산맥에 심었는데, 오늘날의 아크라 위쪽 지역이다. 코코아는 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먼저 새 도구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고, 코코아 열매의 건조며 발효가 단순한 과정이었으며, 오로지 수화기에만 노동력을 대규모로 투입하면 됐기 때문이다.
서아프리카 사람들은 통상상의 기법들을 이미 상당히 많이 알았으며 또 잘 익혀 놓고 있었다. 경작자들은 스스로 코코아 생산에 뛰어든 경우들로서 화폐와 신용이 돌아가는 방식에 익숙했다. 새 경작자들은 흥정을 해서 땅을 사들였는데, 상대는 아킴 아부아콰의 잉여지를 지배하는 수장들이었다. 크로보Krobo족은 비친족 "단체" 곧 토지 구매 조합을 구성해 땅을 단독 소유지로 사서, 이 개별 토지들을 단체 구성원들에게 할당했다. 모계 중심인 아부리Aburi족이나 아크로퐁Akropong족은 모계종족(아부수아abusua)의 이름으로 땅을 사서, 땅의 용익권을 종족 구성원들에게 주는 식이었다.
-670
중국은 또 다른 노동력 공급지였다. 남동아시아에는 유럽 팽창 이전에 이미 중국인들이 나가 있었다. 중국인 무슬림들은 한족들과 페르시아, 아랍, 중앙아시아 출신인 사람들이 통혼하면서 생겨나, 훼이 또는 후이족이라 불렸거니와, 13세기와 14세기 중의 몽골 지배기에 중국 남서부 국경 지대로 옮겨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남아시아 지역을 상대로 육상 교역을 이어갔던 것이다. 중국인들의 통상 거류지들도 이 무렵에 이곳 섬들에 자리를 잡게 된다.
아편전쟁이 끝나고 외부 이주를 막던 장벽이 제거되는 한편 외국 사업가들이 중국 노동시장에 직접 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됐는데, 그 수단으로 세우는 것이 쿨리 거래 체제였다. 어떤 사업가가 말라야에서 쓸 중국인 노동자들을 원하면, 싱가포르나 페낭에서 쿨리 중개상과 접촉을 하면 됐다. 쿨리 중개상은 그러면 산터우나 아모이, 홍콩, 마카오에 있는 "식점" 주인들에게 노동자 주문을 냈다. 식점 주인들은 다시 십장(카타우)들과 접촉을 했고, 이 사람들이 촌락 수준에서 노동자들을 구해왔다.
운임을 자기가 내고 온 노동자들은 도착하고 나서 일을 찾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외상 승객들"은 중개상에게 빚이 있는 동안은 중개상에게 매여 있었다. 말라야에서는, 이렇게 매여서 도착한 노동자들은 수용소에서 지내게 했고, 쿨리 중개상이 고용한 "수용소 관리인"들이 이 노동자들을 감시했다. 대개 쿨리 중개상들과 수용소 관리인들은 비밀 결사에서 지위들이 있었거니와, 이 결사에서 수용소 경비들도 내보냈다. 이 비밀 결사들은 예속돼 있는 중국인 집단을 놓고 사회적 통제와 강압을 유지했지만, 한편으로는 현지 정부들에 맞서 이 중국인 집단의 이해관계를 지켜줬던 것이다. 이 수용소 체제는 말라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때까지도 지속됐다. 이 중국인 노동력 이주에서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싱가포르였다.
-733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략적 근거지들을 또 그곳들에 종속된 지원 지대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자본주의 본국들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진행됐다. 이 점은 강조해야만 하는데, 그 까닭은 핵심 core이니 주변부periphery니 하는 말들을 생각 없이 쓰는 바람에 이 사실을 가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바로 그 핵심 안에 주변부들을 만들어냈다.
웨스트라이딩이나 얼스터는 주요한 산업 중심지가 된 데에 반해, 웨스트컨트리나 이스트앵글리아, 아일랜드 남부는 쇠퇴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가 끝나 유럽 시장들이 잉글랜드산 직물들에 열리게 되자, 여전히 수공 생산을 하고 있던 유럽 지역들은 이 값싼 수입품들을 상대로 한 경쟁에서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갔다. 또 다른 유럽 지역들이 바깥 시장들을 겨냥해서, 특히 라틴아메리카를 보고 직물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제 잉글랜드와 경쟁하다가 무릎을 꿇었다. 아일랜드, 플랑드르와 브 라반트, 프랑스 서부, 에스파냐 남부, 이탈리아 남부, 독일 남부와 동부가 이 몰락에서 특히 영향을 받았다. 이 과정의 산물은 복합적인 위계적 체제였던바, 이 체제는 상당히 많은 보조적 지역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들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다른 생산양식들과 서로 다른 방식들로 결합돼 있었다.
에르네스트 만델은 이 체제에 내포된 이 복합적 관계들을 포착해내는데, "자본주의적, 반자본주의적, 전(前)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들로 이루어진 연접적 체제로서, 이 생산관계들 서로는 자본주의적 교환관계들로 연결돼 있으며 자본주의적 세계 시장의 지배를 받는다.” 첫째, 이런 정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세계 시장" 사이에 구별하는 선을 긋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본주의적 시장 관계들이 만들어낸 체제 안에서 지배적일 수는 있으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세계 모든 인간집단을 잉여가치의 산업적 생산자들로 바꾸지는 않는 것이다. 둘째, 이런 정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다른 생산양식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느냐는 질문을 열어 놓는다. 셋째, 이런 정의는 우리로 하여금 이 체제를 구성하는 저마다 다른 사회 들, 또 하위사회들의 이질성에 눈을 돌리게 하는바, "핵심-주변" 또는 "중심지-위성지" 같은 이분법들을 따르다 이 이질성을 지워 버리지 않게 해준다.
강조를 해야만 하는 것은 만델의 정의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나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내놓은 자본주의 체제 모형들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모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잉여의 이전 과정이지, 그 아래서 잉여가 생성되는 생산양식은 아니다.
-590
프랑크나 월러스틴과는 다르게, 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18세기 후반부까지는 생겨나지 않았다고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 이전까지, 유럽의 팽창이 만들어낸 것은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들에 뿌리를 박고서 거대한 연결망을 이루고 있던 상업적 관계들이었다. 세계 전역에 걸쳐 상품들이 움직이면서 가격들이, 다시 돈을 낳는 돈이 형성됐지만, 그러면서도 생산수단과 노동력 둘 다 아직 자본 아래로 포섭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사회적 노동을 실행하는 새로운 방식을, 또 상업적 시장이 자본주의적 시장으로 바뀌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자본주의적 교환관계들의 출현은 이렇게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달 위에 서 있었던 것이지, 거꾸로는 아니었던 것이다.
-593
자본주의가 주도해서 세계 전역에 조성하는 저 산업 단지들이나 재식농원 단지들의 특징이라면 사회적•문화적 기원이 서로 다른 집단들이 병존한다는 것이다. ... 이 이질성 자체는 노동과정을 조직하는 방식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봐야만 한다. 이런 집단들의 차별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질적인 "복합" 사회들을 이른바 동질적이라는 유럽 사회들에다 잘못 대비시키 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문화적 균질성 때문에 유럽에서는 국가가 발달하고 국민이 형성되고 하기까지가 수월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재식농원 속령들의 "복합 사회들"이 무슨 특별한 사회 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경향을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보여준 사례들이었으니, 이 경향에 따라 다양한 인간집단들에서 노동자들을 끌어다 일종의 "일회용 집단" 을 만들었다가 자본의 필요가 바뀌면 거기 맞춰가도록 이 집단을 해체시키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 경향이 작용하는 모든 사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자본과 노동력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재생산한다. 동시에, 새로 생겨나는 노동인구의 이질성도 재생산한다. 이 이질성은 두 경로로 재생산되는데,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이루는 집단들과 계층들을 위계를 지어 배열하고, 또 한편으로는 상징을 통해 표시되는 "문화적" 차이들을 이 집단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741-742
이 책의 '맺는 말'은 정말 정말 좋았다!!!
생각난 김에 라나지트 구하의 <역사 없는 사람들>, 그리고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탈식민 관련 책 리스트도 링크해놓습니다.
이 책이 묻고 있는 것은 세계를 자족적인 사회들이나 문화들을 뭉쳐 놓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하나의 총체로, 하나의 체제로 바라본다면, 또 이 총체성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어떻게 발달했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또 인간집단들을 거미줄 같은, 그물 같은 연결 관계들로 엮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이해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다.
… 이런 힘들에 끌려 수렴적인 활동들 속으로 들어가고 나자, 기원이며 사회적 구성 방식이 서로들 다른 사람들이 다시 떠밀려 한 공동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참여하게 된다. 이 사람들 중에는 유럽인 해양 상인들과 다양한 국적의 병사들도 있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아프리카인들도, 아시아인들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 모든 사람의 사회며 문화는 상당한 변화들을 겪었다. 이런 변화들은 "진정한" 역사의 견인자들이라 특정된 인간집단들뿐만 아니라 인류학자들이 "미개인들" 이라 부르고, 그리하여 무슨 탈시간적 과거에서 온 때 묻지 않은 생존자들처럼 연구할 때가 많은 인간집단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본다면 "살아 있는 원시인들" 같은 것도, 역사 없는 사람들이니 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750-751
인간집단들이 이렇게 지구적 규모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한 과제이며, 이런 연관관계들의 발달 과정이며 성격을 해명하는 일은 또 다른 과제다. 내가 가진 관점은 이런 연관관계들을 만들어내고 유지시킨 경제적 조건들과 정치적 조건들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이 연관관계들에 대한 어떤 이해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연쇄관계들의 물질적 기반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나 는 마르크스의 착상들에서 끌어온 개념들을 사용했다. 나는 한 개념이 특별한 분석적 가치를 갖는다고 봤는데,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이다.
… 현상 그 자체에는 의미가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관계들이 작용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관계들은 인간집단들이 그 명령에 따르게 하고,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배열시키며,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배열에 어떤 방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한 생산양식의 핵심적 관계들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를 부여하고, 이 행위의 성격을 결정하며, 다시 이 행위에 의해 유지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만들어 가되, 자기네가 직접 선택한 조건들 아래서는 아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이네들의 의지며 욕망을 통제하는 관계들과 작용력들의 제약 아래서인 것이다
사회적 노동의 동원을 규율하는 핵심적 관계들이 각 생산양식마다 다른 까닭에, 각 생산양식은 그만의 분열들을 낳는 까닭에, 서로 다른 생산양식들이 만나면 이 생산양식들이 아우르는 인간집단들에게 모순적 상황들과 갈등들을 떠언기게 된다.
-752-753
서로 다른 생산양식들이 만나는 곳에서는, 집단들의 결합들에도 여러 작용력들이 상호 작용한 흔적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에 걸친 연속성이니, 제도적 안정성이니, 규범에 관한 합의니 하는 것들을 당연하다고 받아 들이는 대신, 이런 것들을 불확정적이라 여겨야만 한다. 이런 특징들을 시간 속에 놓고, 이런 특징들이 나타나 유지되다가 폐기되게 하는 조건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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