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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과 '좌파'의 토론

어제 앤서니 기든스와 윌 허튼의 대담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하는 거였는데요, 번역이 좋지 않아 읽는 재미가 떨어졌지만 '망원경으로 조망하는 효과'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의 궁금증도 같이 얘기하고 싶네요.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의 태도, 즉 시각인데요, 앤서니 기든스는 다들 아시죠.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사람이고, '제3의 길'이라는 노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윌 허튼은 사상적 스펙트럼에서 위치를 찾자면, 기든스보다 약간 왼쪽에 있는 사람인 듯 합니다. '옵서버'와 '가디언'지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대담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차이는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체 좋은 것(혹은 나쁜 것)인가'하는 문제와, '노동자 계..

딸기네 책방 2000.12.18

이성과 욕망이 부딪치는 '섬'

섬 | 원제 Trazo de tiza 미겔란쏘 프라도 (지은이), 이재형 (옮긴이)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섬'이라는 공간은, 글쎄, 별로 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기껏해야 제주도나 거제도밖에 가본 일이 없는데 그 묘한 어감의 공간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내 경험과 지각력이 못 미치는 것 같다. 스페인 작가 미겔란쏘 프라도의 '섬'은 아주 어둡고 아름다운 화면으로 구성된 그림책이다. 굳이 따지자면 '만화'인데, 현실문화연구에서 앞서 발간한 엥키 빌랄의 '니코폴'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적'이고 멋지다. 외딴 섬. 이 섬의 특징을 가리키는 표현은 '지도에 나와있지 않은 섬'이라는 말이다. 지도에 나와있지 않다는 것은 1차적으로 이 섬이 아주 작다는 뜻이면서, 한 차원 더 들어가면 이 섬이 인간의 환상..

딸기네 책방 2000.12.07

폴란드의 풍차

폴란드의 풍차 Le moulin de Pologne 장 지오노 (지은이) | 박인철 (옮긴이) | 민음사 | 2000-10-01 고대 희랍 사람들이 비극을 좋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을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을 쓰는 동안 장 지오노가 그리스의 비극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비극은 항상 운명과 함께 간다는데. 운명,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다. 더우기 나처럼 말초적인 드라마들에 몰두해 있는 독자한테는 다소 어렵기도 한 단어다. 운명은 선대의 실수나 악의, 또는 신의 저주 따위를 후대의 사람들이 극복해낼 수 없기에 생기는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우리 식으로 말하..

딸기네 책방 2000.11.24

앰버연대기

앰버연대기 로저 젤라즈니 (지은이) | 최용준 (옮긴이) | 사람과책 | 2010-07-09 판타지는 인류가 가져온 가장 오랜 문학 장르일 게다. 현대적인 판타지는 알다시피 톨킨이 '반지전쟁'에서 틀을 잡아놨다. 그 틀은 결국 '선과 악의 대립'인데, 착하고 용감한 주인공이 마계에 맞서 싸우는 게 가장 일반적인 구도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은 '판타지'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주제가 상당히 철학적이다. '앰버 연대기'는 무지무지 재미있어서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다음 권을 펼쳐야 하는(무려 5권!) 간만에 만난 재미난 소설이었는데, '어렵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가의 초기 소설인 '내 이름은 콘라드' 못지 않다. 그렇지만 훨씬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있어서, 읽는 동안 날마다 잠자기전 '밤을 새울까 말까' 망설..

딸기네 책방 2000.11.16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1, 2 마루야마 겐지 (지은이) | 박은주 (옮긴이) | 책세상 | 2000-07-10 제목은 멋진데 난 사실 바다가 무섭다. 우스운 소리 같지만 물이 너무 많아서다.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사람들이랑 부산 태종대에 갔었다. 거기서 절벽 밑의 바다를 봤는데, 낮인데다 햇빛이 좋은 날이라서 그랬는지 물이 하늘색이었다. 내가 "물 정말 많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비웃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바위에 누군가가 "물 정말 많다"고 새겨놓은 게 보였다. 그래서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바다는 물 덩어리인데, 난 그게 너무 큰 덩어리라서 무섭다. 특히 밤에는. 난 아마도 바닷가에서는 살지 못할 것이다. 밤만 되면 검고 커다란, 상상도 못하게 커다란 물덩어리가 있는데 무서..

딸기네 책방 2000.11.07

독수리의 눈

독수리의 눈 론 버니 (지은이) | 심우진(그림) | 지혜연 (옮긴이) | 우리교육 | 2000-09-25 호주 동화를 보는 건 처음이다. 호주라는 나라, 어릴 적에는 백호주의라는 이상한 사상을 가진 나라 또는 캥거루나 코알라같은 동물들이 사는 낯선 나라 정도로만 알았었다. 물론 지금도 내게 호주는 낯선 나라다. 호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계기를 굳이 찾으라면 한 장의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백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사냥하는 그림을 책에서 본 일이 있다. 말을 탄 백인들이 총과 창을 들고, 도망치는 원주민들을 사냥하는 그림. '독수리의 눈'은, 내가 그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을 글로 써놓은 동화다. 동화라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의 페어리 테일은 절대 아니다. 사촌지간인 소년과 소녀는, 가족들이 ..

딸기네 책방 2000.10.17

문명의 공존

문명의 공존 Das Zusammenleben der Kulturen 하랄트 뮐러 (지은이), 이영희 (옮긴이) | 푸른숲 갑자기, 서구 학자들이 여러가지 '학술용어'들을 놓고 껌씹기같은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화, 문명, 서구, 아시아적 가치, 민주주의같은 개념들이 너무 홍수처럼 쏟아지고, 또 그 홍수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다보니 받아들이는 나의 작은 뇌가 지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단물 빼먹듯이 개념들을 널려놓고 자작자작 씹어대는 것을 보니 식상하긴 하지만, 의 저자인 하랄트 뮐러 때문에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뮐러가 비판하는 새뮤얼 헌팅턴에 대해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원제 Das Zusammenleben der Kul..

딸기네 책방 2000.10.11

황미나의 '레드문'을 둘러싼 의혹(?)

언젠가 제가 홈페이지에서 전지면씨와 '레드문'과 '총몽'에 대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황미나의 '레드문'을 주말 동안 다시 읽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만화대여점에 가서 10권까지 빌려다가 토요일날 다 읽었고, 일요일에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다른 대여점에 가서 나머지 18권까지를 빌려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었습니다. 'SF 액션 판타지'라고 책표지에 소개돼 있더군요. 말 그대로 SF와 액션, 그리고 판타지가 모두 들어있는 작품입니다. 평범한 고교생이던 '태영'이라는 남자애가 있습니다. 알고보니 태영이는 6살때 사고로 죽었고, 이 아이는 시그너스라는 별에서 온 필라르 왕자였습니다. 태영의 머리에 필라르의 뇌를 이식, 태영의 몸을 빌려 지구에 숨어살고 있었던 거죠. 태영과 필라르라는 전혀 다른..

딸기네 책방 2000.09.18

행복을 전해주는 메신저, '해피'

해피 하마 노부코 (지은이) | 대원씨아이(만화) '마스터 키튼'과 '몬스터'로 유명한 우라사와 나오키의 작품 중에 '해피'라는 만화가 있죠. 테니스 선수들 사이의 사랑과 경쟁, 우정에 관한 것인데 재미가 없어서 5권까지 보다가 덮어버렸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해피'는 우라사와의 '해피'가 아니라, 하마 노부코라는 여성작가의 '해피'입니다. 첫 표지를 알라딘에서 살짝 훔쳐오려고 했는데 우라사와의 것 밖에 없어서 실패했습니다. 하마 노부코는 개를 굉장히 좋아하나봅니다. 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기본적으로 '해피'는 맘에 들 겁니다. '해피'라는 이름의 맹인견과, 그 주인 카오리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린 만화입니다. '맹인견'이라 하니 벌써들 아셨겠지만, 해피의 주인 카오리는 맹인입니다. 스물두살때 사고로..

딸기네 책방 2000.09.10

설명이 필요없는 <비천무>

비천무 김혜린. 대원씨아이 2000/08/22 지금 한창 영화로 상영되고 있죠. 과연 영화를 봐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만화를 본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다들 실망했다던데...김희선이 비천무의 주인공 '설리' 역할을 맡았다는데, 얼굴만 갖고 과연 될까요. 순정만화 팬 중에 김혜린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한국만화의 금자탑이자 불후의 명작이고 길이 남을 고전인 '북해의 별'의 작가 아닙니까. 솔직히 말하면 비천무는 북해의 별에 비해 좀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비천무가 그려지기 시작한 시점이 86년도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죠. 일본것 갖다 베끼기, 캔디와 신데렐라의 짬뽕으로 일관하고 있던 이른바 '순정만화'라는 장르. 우리나라에서는 황미나를 계기로 일대 도약을 이루게 되는 거죠. 그런데 김혜린은 황미나랑 비슷하면서도..

딸기네 책방 2000.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