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인샤알라, 중동이슬람

'제2의 혁명' 꿈꾸는 이란 여성들

딸기21 2009. 6. 1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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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는 9일 밤늦도록 ‘축제’가 이어졌습니다.
오는 12일 대선을 앞두고, 개혁파 후보 미르 호세인 무사비(아래 쪽에 사진 있어요)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제2의 이란 혁명’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와 다음날 새벽까지 축제를 방불케 하는 캠페인을 벌인 겁니다.

이슬람식 스카프에 하이힐 차림으로 무사비를 연호하는 여대생들, 손 붙잡고 거리로 나와 무사비의 상징색인 녹색 깃발을 휘두르는 엄마와 딸들, 페르시안 힙합을 틀어놓고 행진하는 자동차들…. 

테헤란 아자디 광장과 헤이다르니아 스타디움 등은 음악과 행진과 정치 구호들로 뒤덮였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여성들의 옷차림을 단속한다며 횡포를 부렸을 경찰도 질서유지에만 신경쓸 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고 이란 프레스TV와 뉴욕타임스 등이 전했습니다.


무사비 지지자들이 9일 집회에서 무사비의 그림, 피켓 등을 들고 나와 지지 구호를 외치고 있네요. /로이터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거리의 주역인 젊은 여성들입니다.
외신 사진들도 녹색 스카프나 깃발을 든 여성 시위대 일색입니다.
이번 선거의 최대 ‘스타’로 떠오른 것은 무사비의 부인 자흐라 라흐나바드이고, 최대 화두인 경제문제에 대해 가장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여성 유권자들이랍니다. 정치적 자유가 없고 여성들을 억누르는 중동, 특히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근본주의 종주국 이란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는 장면들입니다.

그렇다보니, 억압 속에서도 꾸준히 ‘민주주의 연습’을 해온 이란 여성들의 힘에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습니다. AP통신 등은 이란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이슬람 혁명에 이은 제2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사실 이란 여성들의 활발한 정치활동에는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 이란에서는 파흘라비(팔레비) 왕조의 서구식 개혁조치에 따라 여성들의 투표권이 인정됐고(63년)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68년에는 첫 여성 각료인 파로크루 파르사가 교육장관이 돼 여학생들의 머리쓰개를 벗기고 여성들을 해외로 유학보내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현대 이란의 첫 여성 각료였던 파로크루 파르사의 모습입니다.
제국 시대의 관료처럼 생겼지요? (사진은 역시 위키에서~)


이슬람혁명 뒤 왕조 시절의 엘리트 여성들이 대부분 망명하거나 관직에서 쫓겨났지만, 여성들의 투표권은 그대로 보장됐습니다. 여성들의 투표권은커녕 외출과 운전조차 금지시킨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과는 전혀 달랐던 거죠다.

여기에는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독특한 ‘근본주의 여성관’도 한몫 했다고 합니다. 근본주의자인 호메이니는 모든 여성들에 코란을 따를 것을 강요한 대신, 코란이 금하지 않은 것들은 허용했다는 겁니다. 이슬람 성법(샤리아)을 해석하는 법관 직에서 여성들을 몰아내고 법적 권리도 대폭 줄였지만,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교육은 인정했습니다.


18세기 페르샤 여성들을 그린 궁정화

1968년 테헤란대학교의 원자로 앞에 선 핵공학자들입니다.
과학자들 중 절반은 여성이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사진은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왔습니다.)

호메이니는 또 이슬람혁명 정신을 부추기려 여성들도 거리로 나와 정치 구호를 외치도록 선동했습니다. 호메이니의 딸 자흐라는 여성단체를 이끌면서 이슬람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자흐라는 여성들을 외교관으로 내보내도록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혁명 이후 미국의 제재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더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밖으로 나갔고, 여성들의 대학진학률은 남성보다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이 사람이, 이란 여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 무사비입니다. /AP
이란 정치인들 중에는 유독(!) 잘 생긴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권자들 중에는 유독 미녀가 많은 모양입니다만... )

요새 국가지도자들은 잘 생긴게 대세래요(오바마 참고...) 한국은 빼고...


이 사람이, 이번 선거에서 무사비 돌풍을 일으키는 데에 한몫을 한 부인 자흐라 자흐라 라흐나바드입니다. /AP


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한 뒤 20년 동안 이란 여성들은 보수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정치적 발언을 늘려갔습니다.
97년 정부가 여성들의 축구경기 관람을 금지시키자 5000명의 여성들이 국가대표팀 월드컵 예선전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쳐들어간 ‘풋볼 레볼루션(축구혁명)’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89~97년 대통령을 지낸 중도파 하셰미 라프산자니의 딸 후아에자 하셰미는 96년 스스로 정치에 뛰어들어 마즐리스(의회)에 진출했고, 이란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 금기를 깨는데 앞장섰습니다.

이란 여성들이 ‘표의 힘’으로 정치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97년 대선에서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를 대통령에 당선킨 것이었지요. 하타미 대통령은 마수메 에브테카르라는 여성 과학자를 부통령에 임명, 지지에 보답했습니다.



2003년 여성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차별에 맞서 싸운 이란 여성들의 투쟁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됐습니다.

이번 선거는 12년전 하타미를 당선시켰던 때보다 더 열기가 뜨겁습니다. 9일 녹색 머리띠를 두르고 테헤란 시내로 나온 21세 여성 파티마 타헤리안은 AP통신 인터뷰에서 “젊은층은 이번 선거가 이란의 대외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다”며 “선거 캠페인은 재미와 정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축제”라고 말했습니다.

멀리서나마 이란 여성들의 건투를 빌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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