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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필 마셜, '인티파다'

딸기21 2003. 1. 20.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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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티파다 Intifada 
필 마셜 (지은이) | 이정구 (옮긴이) | 책갈피 | 2001-11-10



1장 인티파다


'점령세대'의 등장: 1987년- 점령지에서 태어나 자란 '샤바브'(녀석들, 젊은이들)이 가자 주민의 다수를 차지. 억압에 단련되고 잃을 것도 없는 젊은이들. "지금 싸우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집트와 요르단의 지배 아래 20년 동안 겪었던 피난 생활에 겁먹지도 않고 1967년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것에서 굴욕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들은 점령 치하에서 성장한 세대다."(예루살렘 포스트)


자유를 위한 투쟁: 산업노동자계급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PLO를 무력화시켰다고 믿었던 이스라엘은 민족주의 운동의 대규모 부활을 목도. 점령은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 레바논 침공에 반대했던 병사들은 Yesh Gvul('한계는 있다') 결성, 군복무 거부 호소. "우리는 점령지 봉기를 탄압하는데 참여하지 않겠다". 그러나 봉기 결과는 처절했다. 1987 봉기 뒤 1년간 감금된 팔 인들 3만명. 1989년 2월까지 살해된 사람 450명. 야세르 아라파트의 '두 국가' 노선은 패배를 자초. 1989년 7월 이츠하크 라빈(국방부 장관)은 13000명 이상 구금. 팔 주민 100명당 1명꼴. 군 참모총장 딘 소므론, "쿠피예(봉기의 상징)를 쓴 팔 인들은 총으로 쏴버리겠다".

2장 제국주의 커넥션

시온주의와 제국주의: 시온주의는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 1880년대 동유럽 지배계급이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유대인에게 강요한 억압에 대한 반작용. 자본주의가 동유럽에 들어오면서 봉건경제에 의존했던 유대인 공동체가 위협받았다. 1896 테어도어 헤르츨의 <유대인 국가>에서 구체화된 시온주의(유대민족주의)는 사회적 불확실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작용. 


초기 시오니스트들의 목표는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어 나라 세울 땅을 구하는 것. 헤르츨은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유대 회사' 건설 주장. "시온주의는 식민주의 사상이다". "새로운 국가는 아시아에 대항하는 유럽의 일부가 돼야 하며, 야만주의에 대항하는 문명의 전초기지여야 한다". 유럽 사회의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했던 시온주의 운동에는 바로 그 유럽사회의 모든 특징이 들어있었다. 보수적 배타적 식민주의적인 방안.


어느 열강에 붙을 것이냐- 1차 대전 이후 영국 쪽으로 정리. 영국 출신 과학자 카임 바이츠만, "영국은 효과적이고 강력한 장벽을 갖게 될 것이며, 우리는 국가를 갖게 될 것이다." 유전-수에즈운하와 가깝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전략적 이해를 갖고 있었다. 영국은 일부 토착민으로 대중을 통제하는 간접통치 선호. 바이츠만의 제안, 즉 팔레스타인에 종속적인 유대 정부를 세운다는 계획을 수용. 프랑스가 시리아를 손에 넣고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은 1917 밸푸어선언.


식민지화 과정: 밸푸어선언 뒤 20년간 유대인 이주 급증. yishuv(유슈프·정착민 공동체)는 이스라엘 국가 기초를 닦았다. 유슈프는 팔 부재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대거 매입, 고립경제 구축. 그 중심은 히스타드루트(히브리노동자총연맹). 유대인 노동 원칙(유대인 노동자만 유슈프에서 일한다), 유대인 생산물 원칙(아랍 상품 보이코트). 유럽에서 파시즘 거세지면서 1930년대 중반 유대인 정착민 44만3000명에 이르러. 초기 이주민들은 시온주의 이상에 불타는 쁘띠 출신들, 새 이주민들은 대규모 자본 동원가능한 부르주아와 전문가들 중심. 이들은 그 돈으로 땅을 샀다.


영국의 지배전략과 유대 공동체의 강화: 영국은 시온주의자 지원↔아랍민족주의 억압. 때문에 아랍인들의 반제 운동 타겟은 유대인 공동체들을 향했다. 영국은 또 팔 내에서도 예루살렘 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같은 우파 기득권층을 지원.
팔 내에서 자본주의적 구조 발전-1936 총파업. 지도부는 항복했지만 게릴라전 계속. 영국은 하가나(정착민 민병대) 밀어주고 무장을 지원. 유대인들은 팔 진압하면서 영국 신임 얻고 무장 강화하고 테러전술 익한 반면 팔 경제는 무너지고 활동가들은 처형·투옥되고 아랍사회는 저항력 잃어. 2차 대전에서 유대인들은 영국 편에서 참전, 전쟁 경험 쌓고 경제 성장. 

3장 이스라엘 국가를 향하여

중동에서 유럽이 퇴각- 미국 개입 시작. 미국의 두 가지 적은 ① 이란을 기반으로 하는 영국의 석유업자들 ② 현지의 반식민지 운동. 때문에 미국은 어떻게든 사우디아라비아를 확보하기로 결정. 1945 2차대전 종전 뒤 미 국무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지대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물질적 보상 가운데 하나". 루즈벨트, "사우디를 방어하는 것이 곧 미국을 방어하는 것".


대세를 읽은 시온주의자들은 미국 쪽에 붙기로 결정. 미국 내 유대인 공동체- 모금 네트워크 구축, 로비단체 결성. 미 빌트모어에서 열린 1942 세계시온주의기구(WZO) 대회는 '빌트모어 강령' 채택, 유대인들의 독자적인 군대 건설 촉구. 다비드 벤 구리온은 영국·아랍과 협상 주장했던 바이츠만파 축출, 유대국가 건설 주장. 1947-1948 아랍-유대인간 산발적 전투, 그러나 게임 안되는 싸움. 1948. 5. 14.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국가수립 선포, 11분 뒤 트루먼은 새 국가 승인.

4장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저항의 정치학: 

① 팔레스타인의 경제구조: 1920-30년대 토지 65%가 도시에 사는 부재 지주 땅. 유대 정착촌 형성으로 현금경제 침투, 토지 사유화, 이농...부재지주들은 유대인에 땅 팔아 팔 농민은 도시빈민화. 아랍인들 중에서는 지주 bg와 신흥 전문가계층만 이득. 
② 정치세력: 후세이니 가문과 나샤시비 가문으로 양분. 두 가문 출신의 팔 지도부는 영국 정부에 로비하는 것이 전부. 좌절한 활동가들은 1930년대 초 영국 경찰과 유대인 민병대의 폭압 속에서도 사이크 이즈 아드 딘 알 카심이 이끄는 카심형제단(이크완 알 카심) 만들어 게릴라전 시작, 유대 정착촌들 공격. 팔 기득권층은 급진파 견제 위해 민족주의 정당 결성. 


총파업과 반란: 1936 총파업 때 영국은 유대 민병대에 의존. 1938 여름 팔 인들 3000-5000 살해. 당시 아랍 노동계급은 시온주의 산업 그늘 아래. 도시와 시골의 피지배계층은 강력한 저항 보였으면서도 왜 bg 민족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나- 형식적으로나마 국제주의 노선으로 아랍·유대인 모두 포괄했던 조직은 팔레스타인공산당(PCP). 그러나 쁘띠와의 '연합전선' 구축 주장하는 스탈린주의 영향으로 민족주의 지도부 지지. 유대인 당원들은 당에서 나와 정착민 공동체 내 좌파 로비단체로 축소.


재앙을 향하여: 1948 4월 유대 민병대는 13단계 데일럿 계획 돌입, 그 전해에 유엔 분할안에서 아랍인들에게 할당됐던 땅 점령. 4월10일 데이르 야신 학살(주민 4백명 중 3분의2 학살). 1백30만 아랍인중 1백만명이 고향 떠나. 

5장 1948년 이후의 이스라엘과 미국

이스라엘과 냉전: 미국은 마샬플랜 일환으로 이스라엘 지원. 이스라엘 경제규모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비중.
1951 이란 무하마드 모사데크 bg 민족주의 정부 집권, 석유 국유화, 앵글로이란석유회사 축출. 하레츠, "이스라엘의 힘을 키워주는 것은 서방 열강들이 중동에서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경비견이 될 수 있다."
1952 이집트 나세르 자유장교단 쿠데타. 아랍사회주의 채택. 미국의 이스라엘 원조는 1951 10만달러에서 나세르 집권 뒤 8640만 달러로 치솟았다.
1956 수에즈 충돌-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결정. 이스라엘은 영-프 꼬드겨 시나이와 가자 침공, 아랍 군대 물리칠 수 있음을 과시. 이집트처럼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국가의 무례함을 처벌' 했던 것. 이스라엘 총사령관 모세 다얀, "이스라엘군이 이집트군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랍 지배자들은 몇년 동안 겁먹고 죽어 지내야 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방파제: 1958 민족주의 물결(이집트-시리아 통일아랍공화국 결성. 이라크 민족주의 정권이 왕정 타도).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에 대한 이스라엘의 '접근 가능성'-남아공 등 독재정권에 미국 원조 대리.


마침내 '경비견'이 되다: 1967 6일 전쟁. "이스라엘은 단기간에 결정적인 전투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베트남전과 달리 이스라엘은 미국의 여론을 분열시키지도 않았고 미국인들을 정신적 고통에 빠뜨리지도 않았다"(LA타임즈). 1970 요르단 후세인정권 위기 때에도 군대 보내 후세인 도와. 60년대 말∼미국은 '군수조달법'에 따라 이라크 군사차관 거액 지원.
테헤란에서 텔아비브까지: 1973 이집트의 공격- 닉슨, 이스라엘 전폭 지원 명령. 이스라엘은 역내 초강국이자 독자적인 무기생산국으로 등극. 남미 독재국가, 이란 친미정권, 남아공에 무기 대량판매.
1979 이란 혁명. 로널드 레이건, "이란의 몰락은 이스라엘의 가치를 높여주었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동에서 진정으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적 자산이 됐다". 1982 미국에서는 물론 이스라엘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던 레바논 침공 이후에도 미-이스라엘 밀월관계는 개지지 않았다. 

6장 팔레스타인의 디아스포라

알 파타: 아랍 각국으로 흩어져 도망친 팔 난민들도 돈 있고 없고에 따라 계층이 갈라져. 돈 있고 기술 있던 이들은 각국에서 경제 주도층으로. 반면 대부분 빈민들은 중동 역내의 최하층 노동자가 됐다. 돈은 있는데 권력 없던 bg들의 정치의식을 대변하는 것이 민족주의 내세운 아라파트의 알 파타. 파타의 기원은 50년대 초 이집트 카이로의 학생조직. 순니 무슬림 bg 가문 출신들. 팔 내부동력 아닌 외부 아랍 정권에 의존하는 운동노선. 우릴 도와줄 아랍 정권들에 해 되는 짓을 하지 말자는 '불간섭 정책'. 이전 세대 민족주의 지도부보다는 발전했지만 팔 투쟁의 본질이어야 할 제국주의와의 싸움은 애당초 선택하지 않았다.
아랍의 좌파: 희망 걸었던 나세르는 팔레스타인 도울 계획 없음을 실토. 스탈린주의는 중동에 피해만 주고. 
① 이집트: 40-50년대 가장 공업화된 나라. 노급 혁명 가능성도 가장 높았지만 이집트 공산당은 나세르 정권 성격조차 파악 못하고 무비판적인 지지로 돌아서 59년부터는 사실상 활동중단.
② 이라크: 50년대말 노동자운동 성장했으나 카심 정부 아래에서 이라크공산당은 '공동집권' 헛된 망상에 빠졌다. 결국 카심 정권 하에서 바트당이 저지른 대학살의 최대 피해자가 돼 수천명이 죽었다. 
③ 이란: 40년대 내내 노운은 왕조와 대결. 51년 무하메드 모사데크가 이끄는 민족주의자들 집권하자 노운 급격 고조. 그러나 친모스크바적인 투데당은 기회 놓치고 이란은 다시 제국주의 영향력 아래로.


좌파의 영향력 상실과 반대로 팔 저항운동에 많은 영향 미친 민족주의 운동
① 바트당: 쁘띠 형성 반영, 각국에서 민족주의 약진. 초기 대표적 사상가는 1940 바트(부활)당 조직한 시리아의 미첼 아플라크. 바트당 슬로건은 '통일, 자유, 사회주의' '불멸의 사명을 띤 단일 아랍민족'. 아랍 전역에 영향력,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도 많은 팔 학생들이 바트당에 가입. 그러나 근본적으로 엘리트주의 한계. 
② 아랍민족주의운동(ANM): 1949 레바논에서 결성. 슬로건은 '통일, 자유, 복수, 피, 강철, 불'. 아랍통일을 최우선시. 초창기에는 反맑스주의 정서. 레바논 예멘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 아랍 전역에 지부 건설, 특히 나세르의 자유장교단 정권 열광적 지지. 그러나 역시 쁘띠 bg 써클 수준 극복 못해. 파타는 뒤에 팔인들이 스스로 해방투쟁 주도해야 한다고 결론내리고 이들과 결별. 그러나 파타 역시 아랍 각국정권에 의존했던 ANM 한계를 넘지 못했다.

7장 파타와 좌파

민족주의 투쟁 그리고 '불간섭': 파타의 슬로건은 '귀향'. 단순했다. 그래서 추방당한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세르의 '실토'로 오히려 파타에 귀기울이는 이들이 늘었다. 파타의 영향력이 커지자 아랍정권들은 팔 급진세력 견제 위해 1964 아메드 수케이리를 지도자로 하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결성 지원. 1965 파타는 첫번째 게릴라전 시작, 팔 '혁명' 개시. 파타 운동의 핵심은 민족주의와 게릴라투쟁. 그러나 이것은 팔 민중 대다수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안맞았다. 아랍 지도자들 설득하는데 지쳐서 대중투쟁 조직하는데 전념했지만, 대중투쟁이 아랍 정권들을 향해 치닫는 것은 막아야 하는 딜레마. 아랍 정권들의 내정에 간섭 않는다는 원칙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유지해야만 했다.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것은 그 정권들이었는데도. 파타를 이끈 bg들은 혁명이 아니라, 자기네들 '돈'에 걸맞는 '권력'을 원했던 것일 뿐.


'혁명적 폭력': 파타는 베트남·알제리에서 영감을 얻은 '인민전쟁' 사상 발전시켜 '대중무장투쟁' 제창. 그러나 팔 땅은 알제리, 쿠바, 베트남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 못해. 1965 이스라엘 군사공격에 대한 부분적 공격 시작, 2년간 게릴라전 되풀이. 1967 처음으로 팔 영토내에서 광범한 무장투쟁 돌입. 파타 게릴라 300명이 요르단 카라메 근처에서 이스라엘군 15000명 격퇴. 1948 이래 아랍이 거둔 최초의 승리. 파타는 자신들이 중국처럼 장기적인 게릴라전 수행하고 있다고 착각. 


급진적 비판자: 파타 노선 비판해온 옛 ANM 출신들이 1967 떨어져나와 팔레스타인민중해방전선(PFLP) 결성. 아랍민족주의에서 갑자기 맑스레닌주의로 전환. 1968 여기서 팔레스타인해방인민민주전선(DFLP) 다시 갈라져나옴. 그러나 이들 모두 파타라는 '대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이중의 모순: 민족모순/계급모순
검은 9월: 1970 당시 요르단 국민 70% 팔인. 후세인 왕정 전복운동, 파타는 후세인에 "우리는 적 아니다" 납득시키느라 시간 소모. 반면 후세인파는 그 사이 전열 가다듬어 파타운동 분쇄. 후세인은 이스라엘군까지 끌어들여. 반면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는 팔 돕겠다던 약속 저버리고 외면.

8장 영토 없는 국가

'소국가': 60년대 레바논의 팔 계열 인트라은행이 쿠웨이트와 사우디 왕족들의 자금회수 압박으로 무너진 사례는 팔 측에 '국가없는 설움' 각인시켜.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자본주의 프로젝트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파타는 bg의 이해+파이잘 사우디왕 등과의 친분을 세력 확대의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사우디가 PLO를 지원한 것은 자국내 팔 노동자들 통제토록 하기 위한 것.

1973 전쟁 뒤 파타는 팔 전지역의 해방 대신 '소국가'라는 전망을 수용, 미-이스라엘과 협상에 들어가. 파타는 유엔총회 연설(한손에는 총 한손에는 올리브)로 국제공인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함정일 뿐이었다. 


레바논 전쟁, 그리고 '고립': 195 레바논 우익이 팔 난민촌 공격, 내전 시작. 레바논 내분=팔 문제였는데 파타는 '불간섭' 내세우면서 회피. 시리아가 난민촌 공격에 가세하고 나서야 싸움에 참여. 1982 이스라엘이 레바논 침공, PLO는 아랍국가들 외면 속에서 외롭게 베이루트를 지켰다. 83, 94년 팔 게릴라들은 각국 난민촌에 수용됐고 파타는 무기력해졌다.
베이루트의 진창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PLO는 튀니스에 본부를 설치했지만 무장투쟁은 완전히 힘을 잃었다. 난민촌은 고립된 섬들로 전락했고,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레바논을 나눠 통제하기 시작했다. 레바노 시아파 민병대 아말은 베이루트의 팔 난민촌에 살인적인 공격을 가했다. 80년대 중반, 서방과 중동의 정권들은 이제 PLO가 끝장났다고 믿게됐을 정도였다. 레바논 내 PLO 기지들은 거의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1987 인티파다가 일어났던 것이다. 순전히 자생적으로.

9장 점령지

점령지의 현실: 봉기는 PLO를 소생시켰다. 198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팔 대중들이 시온주의와 직접 대결하게 된 것이다.
팔 점령지에 건설된 유대인 정착촌들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었다. 1977 이스라엘 리쿠드당 연립정부의 점령지 정책에 따라 대거 건설된 정착촌들은 사실상 요새였다. 정착촌은 이스라엘군과 정착민 민병대의 보호를 받았다. "정착촌은 이스라엘이 빼앗아 통치하는 모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사상(대단히 온건한 '소국가'라는 아이디어조차도)을 영원히 박멸하겠다는 이스라엘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관심사는 첫번째는 토지, 두번째는 물. 1948-1967 이스라엘은 요르단과 레바논의 물을 엄청나게 빼돌렸다. 이스라엘은 또 서안의 수자원도 미친듯이 들이켰다. 1967-1983 팔 마을의 용수로와 물펌프를 없애면서 이스라엘 정착촌에 우물을 파는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을 고갈시켰다.


이중의 착취: 점령지 주민들은 대부분 난민촌에 살았기 때문에 항상 실업률이 높았다. 이스라엘은 1968 가자지구에 고용청을 만들어 염가에 노동력을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관리지역'(서안과 가자) 출신들의 몫은 비숙련직일 뿐이었다. 이스라엘은 첫째, 노동착취, 두번째는 상품시장으로 만들어 팔레스타인을 이중으로 착취. 팔 지역은 이스라엘의 수출시장으로 전락, 팔 지역과 다른 아랍국들과의 교역량은 거의 미미해졌다.

10장 봉기

돌들의 혁명: 점령지 주민들은 집단투쟁으로 다시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마을과 도시들 간에 각종 위원회의 이름으로 새로운 네트워크가 생겼다. 이런 위원회들은 자생적으로 나타났지만 몇달 안 가 통합봉기사령부라는 틀을 갖췄다. 주로 파타 멤버들로 구성된 PLO의 유력인사들이 튀니스의 아라파트와 연락하면서 봉기사령부를 이끌었다. 사령부는 이스라엘 상품 불매운동과 가게 철시 등 '자조' 활동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켰다.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억압 뿐이었다. 통행금지령과 연좌제 처벌, 감금.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봉기를 막을 수 없었고, 이스라엘 내에서 강압적인 점령지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봉기의 문제: 그런데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식민지정책으로 팔 땅에 pt 계급이라 할 세력이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시온주의의 억압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제대로 동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점령지에서 핵심 산업 종사자들은 여전히 유태인들이었고, 이스라엘 고용주들은 비숙련노동자 갈아치우기와 외국인력 수입으로 팔측 파업에 대처했다. 때문에 이스라엘에 준 경제적 타격은 일시적, 부분적인 것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계급 불문하고 팔 봉기에 기민하게 통일된 대응을 보였다. 유대인 노급은 시온주의 국가에 충성. 히스타드루트는 아랍-유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 팔 노급을 분쇄한 것은 이스라엘 노동자들. 팔 탄압에 반대하는 이스라엘의 목소리는 여전히 소수였다.


중요한 위치에 선 파타: 아라파트는 당시에 팔 땅에 없었다. 민족운동은 '정치적 진공상태'에 있었다. 점령지 주민들은 젊었다. 파타의 영향력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런데도 자생적 봉기를 조직화해야할 시점이 되자 앞에 나선 것은 PLO와 파타였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세속주의가 강했던 팔 민족주의 내에서 이슬람 행동주의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 원래 팔 주민 10%가 기독교, 때문에 종교 색채가 짙지 않았는데 이란혁명의 영향 + PLO의 실각 기간 동안 이슬람 행동주의가 자라난 것. 80년대 이슬람 지하드가 가자에서 결성된 것을 비롯해 민족운동 내 전투적 이슬람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40년대 이후 팔 운동에 관여했던 무슬림형제단은 인티파다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우디의 지원을 받아 하마스(열정)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슬람 무장단체들도 여전히 민족주의 틀 안에서만 운동.

11장 인티파다의 영향

봉기의 영향력: 쿠웨이트는 아랍국가 중 처음으로 인티파다 재정지원. 액수(500만달러)는 작았지만 정치적 연대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 쿠피야가 다시 저항의 상징이 되면서 각국에서 연대운동에 불이 붙었다. 특히 이집트에서 가장 큰 영향력. 학생과 이슬람 활동가들(가마트)이 연대를 외치면서 반 무바라크 시위를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동참하기 시작하자 이집트 정권은 경찰력을 총동원해 탄압 시작. "연대운동이 그 자체의 동력을 발전시켰으며, 시위 때마다 정치적 일반화가 진행됐다. 
이집트는 아랍의 모든 정권들이 두려워하는 것-저항의 파급효과-을 보여주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시온주의에 저항하는 행동을 통해 중동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와 대결했다. 아랍 학생과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자국 내 계급관계, 그리고 자기 지배자들과 세계체제를 연결시키는 관계와 충돌했다." 그러나 시위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곳은 사실상 이집트 뿐이었다. 대부분 아랍국가에서 정권의 억압이 진행된데다 좌파는 스탈린주의의 영향으로 파산 상태였기 때문. PLO는 자기들이 팔레스타인 봉기를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주력. 그 대신 아랍국들로부터 돈을 받아내는 것이 파타운동의 현실이었다. 


석유: 아랍 지배자들은 미국이 석유가 관련됐을 때에만 중동 문제에 빨리 대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라크-요르단-이집트의 새로운 친서방 동맹이 생겨났다. 이들은 미국에 PLO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어 협상을 시작하게끔 하도록 미국에 요구했다. 서방의 이해관계와도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이 요구는 먹혀들었다. 특히 80년대 초반 경기침체로 석유소비가 크게 줄어들었던 상황이 반전돼, 80년대 중반부터는 경제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미국의 석유소비가 늘고 있었다. 미국이 원유수입에 더욱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상황에서 1988 '북아프리카 인티파다'가 터져나왔다.


'전염': 프랑스인들을 추방한 알제리는 20년간 국가자본주의의 길을 걸었다. 농업을 비롯한 산업 국유화, 권력은 지배관료들로 이뤄진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수중에 집중, 친모스크바적인 대외정책 채택. 그러나 80년대초에 벤제디드 정권은 방향을 우선회, 민영화·외자유리·친서방정책으로 돌변. 대미 교역, 특히 무기거래가 급증. 서방은 알제리를 '아랍 실용주의'의 모델로 칭송. 그러나 실제 알제리 내에서는 계급 격차가 커져만 가고 있었다. 결국 1988.10. '알제리판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차들리 정권은 탄압에 나섰고, 아랍 정권들은 서둘러 알제리정부를 지원했다.

12장 '사이비 국가'

소국가 논쟁: 중동 상황이 심상찮다고 여긴 미국은 아랍정권들의 조언에 따라 이-팔 양측에 협상을 강요. 아라파트는 공개적으로 시온주의국가를 용인했고, 미국은 협상에 동의.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을 인정하면서 소국가 방안을 수용함으로써 민족주의 운동의 원칙 하나를 저버렸다. 그 원칙이란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해방돼야 하며, 유대인 정착촌 때문에 빼앗긴 고향에 되돌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겉치레조차 벗어던진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의 한 분파로 전락했다. 민중전선측은 '소국가'라는 발상에 반대했지만 무력했다. 팔 난민들, 특히 소국가 방안에 포함되지 않은 땅에 거주하는 많은 추방당한 팔 인들은 협상에 거세게 반대했지만 파타 지도부는 70년대 말부터 이미 미-이스라엘과의 비공식 회담에서 많은 것을 양보해버린 뒤였다. 세력이 약화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PLO는 '협상을 위한 협상'에 매달렸다. 인티파다로 대중들의 힘을 보여준 뒤였지만 PLO는 여전히 협상에 매달렸다.


'권력 없는 국가': 유대인 정착촌들은 팔 국가 건설에 강하게 반대. 독자적인 민병대 만들어 저항. 구휘 에무님(우익집단들)은 정착촌 확대 주장. 이들의 우두머리는 아리엘 샤론. "서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또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1989. 4). 당시 야당이던 노동당이 갖고 있던 그나마 '전향적'인 입장도 

① 팔레스타인 소국가는 팔 지역의 극히 일부만을 차지해야 한다 

② 소국가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들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팔레스타인은 권력없는 주권국가가 될 것이다") 

③ 소국가는 군대를 갖지 못한다 

④ 소국가는 이스라엘의 경제적 지배하에 놓일 것이다 라는 수준이었다. 


협상을 위한 협상:1989 미-PLO 협상에서는 팔측 '테러리즘'과 '테러를 중단시켜야 할 팔측 책임'이 주요 의제가 됐다. 요르단에서 반후세인 시위가 벌어지면서 경계심을 느낀 미국이 이스라엘에도 협상에 나설 것을 강요. 그런데 PLO는 반후세인 봉기와 자신들은 관련없다는 것을 입증하느라 에너지 소비. 미국과 이스라엘에는 '협상을 위한 협상' 만큼 유리한 것이 없었는데 PLO가 거기에 완전히 말려들고 있었다.

13장 팔레스타인과 아랍 혁명

스탈린주의의 유산
아랍의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
새로운 전통
권력으로 가는 길

2000년 인티파다 - (무기력한 가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평화협상'의 신화)

국가방안
오슬로로 가는 길
"여러분이 심은 모든 나무, 여러분이 지은 모든 집은"
물 전쟁
계엄 하의 팔레스타인 경제
인권과 안보
이길 때까지 협상한다?


(참고)


1. Yesh Gvul
An Israeli peace group that has shouldered the task of supporting soldiers who refuse assignments of a repressive or aggressive nature. The brutal role of the Israel Defence Force (IDF) in subjugating the Palestinian population places numerous servicemen in a grave moral and political dilemma, as they are required to enforce policies they deem illegal and immoral. The army hierarchy demands compliance, but many soldiers, whether conscripts or reservists, find that they cannot in good conscience obey the orders of their superiors.

2. 카임 바이츠만(1874∼1952)과 아세톤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바이츠만은 언젠가는 이스라엘로 되돌아가겠다는 신념이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
아세톤은 소총의 탄환이나 폭약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물질이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양의 아세톤이 필요했다.
바이츠만 시절에는 밀폐용기 속에 나무를 넣고 끓여 증발되는 증기를 모아 아세톤을 생산. 이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아세톤은 아주 적은 양에 불과했다. 
1914년 설탕에서 인조고무를 만들기 위한 세균을 찾고 있던 바이츠만은 우연히도 설탕을 아세톤으로 변화시키는 박테리아를 발견, 연구 끝에 박테리아를 이용해 이소아밀 알콜(설탕을 발효시켜 에틸알콜을 만들 때 소량의 불순물로 생기는 것)과 같은 박테리아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분석 결과 그것은 이소아밀 알콜이 아니라 아세톤과 부틸 알콜의 혼합물이었다.
바이츠만은 녹말을 설탕으로 만들고 박테리아를 이용해 다시 아세톤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박테리아를 바이츠만은 '클로스테리듐 아세트부틸아민'이라고 불렀다. 바이츠만은 자신이 개발한 아세톤의 대량제조방법을 영국의 육군성에 보고했다.
전쟁이 치열해지자 아세톤의 원료인 나무는 수송될 길이 막혀버렸고 탄약은 떨어져갔다. 바이츠만은 영국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바이츠만은 영국의 군수품위원장이었던 로이드 조지의 협조로 대규모 아세톤공장을 세워 미국산 옥수수로 대량의 아세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옥수수의 해상운송조차 어려워지자 바이츠만은 소년들애개 밤을 모아오는 운동을 벌이게 해서 아세톤을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밸푸어를 만났다. 바이츠만은 밸푸어에게 유태 독립국가 건설 필요성을 설득했고, 밸푸어는 "이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면 예루살렘을 유태 민족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군수품위원장 조지가 수상이 되고 조국해방의 빛이 보이더니 마침내 1917년에는 '밸푸어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1948년 바이츠만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3. 이라크 카심 정권
1917년, 1차대전 전승국인 영국이 옛 바빌로니아 지역을 위임통치 시작. 영국은 주민 반발 무마하기 위해 1921년 메카 하심 가(家)의 파이잘을 초대 국왕으로 임명, ‘이라크 왕국’이라는 입헌군주국을 탄생시켰다. 이라크 왕국은 1932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 그러나 파이잘 사후, 군부가 세져 1936년 시드키 장군에 의해 아랍 역사상 첫 번째 쿠데타가 이라크 왕국에서 일어났다. 이어 1958년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왕정은 무너지고 ‘이라크 공화국’이 성립. 5년 후인 1963년 카심 정권은 아마드 하산 알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 등 바트당 장교들에 의해 다시 무너진다. 

4. 모사데크(Mossadeq 1881-1967)
이란의 지주 아들로 태어나 유럽에 유학한 후 주지사를 거쳐 재무 장관에 취임. 1927년 레자 샤와 대립, 추방됐다가 1944년 의회 진출로 민족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부상. 이란 북부유전 이권을 소련에 넘기는데 반대. 51년 총리 취임 뒤 영국계 앵글로이란석유회사 국유화 단행,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폈다. 1953년 친미 왕당파 사헤데이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 팔레비 왕정 부활.

5. 미첼 아플라크(1910-1989)
다마스쿠스 출생. 1929∼1934년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하며 맑스주의에 물들었고, 귀국하여 다마스쿠스에서 교사로 일했다. 모든 아랍국들을 사회주의로 통합한다는 정치적 신념으로 1946년 바트당을 창당. 아랍 통일을 위한 왕성한 정치활동 결과 1958년 시리아와 이집트가 합병하여 통일아랍공화국(U.A.R)을 수립하는 결실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통일아랍공화국의 대통령 나세르는 아플라크의 기대와 달리 통일에 기여한 바트당을 탄압. 결국 정치적으로 무력해지다가 1961년 시리아가 통일아랍공화국에서 탈퇴. 1963년 시리아 새 정부가 무너지자 정권을 잡게 되었다.
바트당의 지배강화를 위해 나세르와 통일회담을 진행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급진파와 군인그룹에 의해 당에서 추방되어 1966년 레바논으로 거처를 옮겼다. 1969년 이라크에 초빙되었고, 1970년 바그다드를 거점으로 이라크와 시리아, 레바논의 바트당 일부를 이끄는 범아랍지도부 서기장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제국주의 문제를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생각하였다. 비폭력으로 아랍인과 아랍사회를 개혁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창조적 정당을 목표로 통합과 자유,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정치사상으로 바트당을 이끌었다. 주요저서에 《바트당을 위하여》가 있다.

6. 알제리 정치사
132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1962년 독립. 
1963년 아흐메드 벤벨라(Ahmed Ben Bella)가 초대대통령이 되었으나, 1965년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시키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중심으로 '혁명평의회'를 설치, 1967년 대통령에 취임. 
1976년 국가헌장과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채택되었으며, FLN을 유일한 정당으로 지명했다. 그해 12월 직접선거로 부메디엔이 당선되어 1978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 그의 정권은 사회주의적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아랍연맹과 아프리카 통일기구 안에서도 혁신파·과격파로 평가되어 왔다. 서사하라 문제를 두고 1975년부터 모로코·모리타니와 대립. 1977년 1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평화협상에 강력히 반대, '거부전선(拒否戰線) 그룹'의 주도. 
1978년 12월 FLN 특별대회에서 벤제디드 샤들리(Benjedid Chadli)가 부메디엔의 후계자로 지명, 1979년 2월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 부메디엔 체제는 중앙집권적인데다 대통령 개인의 권력이 강력하였으나, 샤들리는 집단지도체제에 의한 정책결정을 기본방침으로 하였으며, 외교노선도 유연했다. 1974년 대미관계 회복, 이듬해 프랑스와 외교 재개, 구소련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 1979년 6월 초대대통령 벤벨라 석방. 1989년 새로운 헌법을 채택, 국가를 FLN당과 분리시킴.
1992년 2월 알제리 전역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샤들리가 물러나고, 1994년 1월 리아민 제루알(Liamine Zeroual)이 대통령 취임하였으나 1998년 9월 군부 압력으로 사임. 1999년 4월 아브델 아지즈 부테플리카(Abdel Aziz Bouteflika)가 대통령에 취임.


 

아, 다 읽었다.....끄윽.

 
구두님, 읽지 말라는데 왜 읽어욧! 
가만보면 구두님 참 재밌다니깐 :)
 
음,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어하는 그런 애들 있잖아요. 
제가 그렇다는 말씀. 그런데 이 책을 읽었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이 책의 이런 내용을 자료로 한 번 사용하겠다는 뜻인가요. 아, 물론 읽기야 읽었겠지만....흐흐. 필 마셜의 지적 중에 바트당에 대한 것은 정말 적절한 듯.
 
구두님, 저는 이 책에서 바트당에 대한 비난이나, 아랍 좌파에 대한 비판 부분 읽으면서 <설득력 있는 지적>이라고는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지적에는 <분위기상> 동의해줄 수 없습니다. 
1930년대 이후 사실상 중동 정세를 쥐고 흔든 것은, 중동의 <구조>를 만든 것은 영국-그리고 뒤를 이은 미국입니다. 모든 식민지의 역사가 그렇듯이- 좌파를 탓하는 것은 민중의 힘을 지나치게 우상화한 나머지, 현실구조를 무시하고, 그나마 애써보려던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짓이 되지 않나 하는 것이죠. 물론 필 마셜이 이 책에서 제국주의에 대해 비난하느라 펄프를 낭비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기도 합니다만, 현실에서, 이른바 <좌파>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이 갖고 있는 함의가 대체 뭔가요. 
IMF 정국에서 민노총이 참 잘못 많이 했습니다. 당시의 조직구조도 문제였고, 조직 상층부의 인식도 문제였고, 문제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상황은 아이엠에프 경제위기라는 어마어마하고 강압적인 파도 속에서 민노총이 무언가를 하기에는 역부족인 측면이 많았습니다. 민노총이 잘못해서 노동자들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런 비판들이 나오는 것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더우기 그런 비판들은, 항상 노동계 내부에서 나오지요. 대포 가진 놈이 뻥뻥 쏘아대는데 여기서 돌 던지며 항의하는 애들한테 "야 앞에 선 너네가 돌을 잘못된 방향으로 던지니깐 우리가 깨지지"라고 하는 식. 
구두님이 바트당 부분 언급하신 것에 대한 저의 <항의>는 아니고요, 필 마셜이 얘기하는 것이 아주 오래된 틀(최소한 1990년 이전)에 입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멋대로 떠들어본 거랍니다.
 
아, 저는 딸기님의 그런 점이 좋습니다. 
바트당이 쁘띠적이라는 지적에 공감한다는 차원이었을 뿐인데 갑자기 민노총 이야기까지 번져서 약간 당혹스럽긴 하지만....IMF라는 그걸 국난이라고 해야할지는 좀더 시간이 지나봐야 명확해지겠지만(?) 지금 현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당시 우리사회의 수준으로는 IMF라는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야 할지 누구도 몰랐다는 겁니다. 그건 지식인들의 책임도 피할 수 없는 거였지요. 뭐, 지식인도 모르는데 노동자 나부랑이들이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해보자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란 건 누구보다 딸기님이 잘 이해하고 계시겠지요. 
저는 요사이 진보의 새로운 틀, 아직까지는 무정형에 가까운 새로운 미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망들이 어떤 형태로 나아갈 것인지, 그리고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당신과 동시대의 고민많은 한 인간일 뿐입니다. 후세의 사가들은 21세기의 초반 한국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고심한 우리들을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그 시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하다못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보다 손쉽게 말하는 척하고 있는 20세기를 말하듯 당대를 살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확실한 건 우리의 미래는 마치 터미네이터의 전망처럼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좌파의 한계는 늘 상존합니다. 
왜냐하면 좌파는 늘 새로운 미래를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당장의 노력으로 눈앞에 그 몸뚱아리를 드러내지 않지요. 좌파에 대한 비판은 그래서 늘 한결같고 그 시점에서는 일견 타당해보입니다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꾸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겠죠. 왜냐하면 미래는 지금 우리들의 꿈꾸는 수준의 일정한 부분을 이뤄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 당시 왕의 목을 자르리라고 그렇게 해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공화국을 이룩하리라고 당대에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는 왕들이 존재하지만 그 왕들이 과거의 왕과는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실이라는 나무 사이에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숲을 보고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우리들은 알 수 없지요. 좌파의 고민은 그것이겠지요. 저는 민중적 전망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신뢰하는 것과는 좀 다른 뉘앙스이긴 하지만 민중적 전망 아래에서는 신뢰하기도 합니다. 결국 저도 그 안에서는 작은 입자이고, 입장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가끔 어떤 이들은 참 속도 좋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애늙은이같다고도 합니다. 글쎄요. 제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바닥을 이미 십대 때 경험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비판들에 대해 넉살좋게 민중적 전망을 운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된 좌파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비판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이런 부분들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야 하겠습니다.
 
흐흐, 괜히 읽지 말라는 거 읽어서 고생이네요.  
저 책 읽으면서 갑갑했던 부분을 혼자 조용히 속으로 삭히고 있었는데 구두님이 말을 걸어오니깐 잘됐다, 이 참에 투덜거리자 하고 시비걸었어요. 역시나 구두님의 더욱 긴 답글- 히히 잘 읽었습니다 :)  
읽지 말라는 것을 읽으면 이렇게 되는 거군요.. 가만히 있길 잘 했지..  
푸하하 살구...^^  
음, 나는 왜 자꾸만 딸기님의 고단수 술수에 넘어가는 것이더냐.....억울하다.  
안 읽었다^^ 
이 책 읽었거든요. 
내가 느낀 점하고 같은 생각. 반가운데...읽을 때 답답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책 번역한 사람 민노당 중앙위원이던데...잘 하겠지...라고 믿는 수 밖에.

딸기야, 언젠가부터 행동하는 사람은 비판하지 않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안타까움일 뿐이었던 가시돋힌 말들로 많은 것을 잃었지. 가장 소중한 것, 마음의 칼을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선거 직후에 민노당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 싸우고 만 일이 아직도 마음 아프다. 한나라당이 존재가치가 있는 당이라는 친구말에 내가 흥분해버려서 말이지(내가 흥분 잘하잖아^^ 음...넌 못 봤을 수도 있겠구나). 민노당에서 일하는 친구의 그 말은 노사모로부터 받은 스트레스의 분출 그 이상이 아니었는데, 한나라당의 존재근거에 대한 논쟁으로 치닫고 만거지. 

역사는 항상 올바른 말만 남기겠지. 누구만의 것도 아닌 일반의지로서의 올바름. 무르고 약한 땅에 뿌리내린 민노당이 올바름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 많은 실패와 아픔 안타까움이 지천에 널리겠지. 그래도 최소한 내가 행동하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마음의 칼은 말 아닌 다른 것으로 벼리기로 한다. 
무비판...올바른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무관심으로 가는 지름길은 아닌 걸까? 바람이 머물다 스친다. 좀 한심하기도 하네 
(오~한심!! 딸기의 한심은 이런 건 아니지. 딸기는 폼나는 말로 저~널리스트^^ )
 
현채, 역시. 
솔직히 난 민노당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다--고 하면 
그다지 솔직하지 못한 거고, 관심은 사실 조금(아주 조금) 있다 
무비판이 무관심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기보다는, 
무관심을 무비판으로 호도하려는 속셈^^;; 적어도 나의 경우는. 

바람이 스친다고. 
<행동하는 사람은 비판하지 않기로 했다>는 너의 말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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