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
Failed States: The Abuse of Power and the Assault on Democracy
노엄 촘스키 (지은이) | 강주헌 (옮긴이) | 황금나침반 | 2007-02-25
촘스키의 책, 신선미가 떨어져서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는데 어째 또 한권 뚝 떨어졌다. 읽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그동안 우르르 쏟아져나왔던 책들이 전작들 울궈먹기 짜깁기로 펴낸 듯한 느낌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이번엔 이라크전 이후 상황에 대한 내용들이 꽤 들어가 있다. 촘스키가 이제 어찌나 유명한지, 원제는 ‘실패한 국가’인데 한국어판 제목은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로 바뀌었네그랴.
눈길 끌었던 대목 몇 토막.
▷ 이스라엘 군 역사학자 마틴 반 크레펠드는 “미국이 이라크를 어떻게 공격했는지 세계는 똑바로 보았다. 이미 밝혀졌듯이,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이런 지경에서 이란 지도층이 핵무기를 건조하길 포기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이 헛발을 짚으면서 이란에게 강력한 핵무기의 필요성을 깨우쳐 준 셈이다. ...
워싱턴에서 벌어지는 무력 시위가 이란과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증거는 아닌 듯하다. 몇 년이나 앞서 공격 신호를 보내는 것도 현명한 짓은 아닐 테니까. 목적은 더 억압적인 정책을 채택하도록 이란 지도부를 자극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 정책으로 내분이 조장되면 미국이 군사행동을 감행할 정도로 이란이 약해질 수 있다. 또한 강압 정책은 이란을 고립시키는데 참여하라고 워싱턴이 우방국에 압력을 가하는 데도 유리하다. [132쪽]
▷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맥과이어는 그 이유를 워싱턴의 악의적 행동과 위협에 비추어 검토했다. 초강대국 미국과 그의 강력한 동반국, 게다가 다른 핵 보유국까지 이란을 에워싸고 있다.
...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위협은 워싱턴이나 런던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심각하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와도 같은 상황이다.
...미국의 다른 행위들도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에 따르면 핵 억제력을 개발하려는 인도의 결정은 1991년 걸프전과 1999년 세르비아 폭력으로 굳어졌다. “두 곳 중 한 곳이라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미국도 섣불리 전쟁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는 이런 교훈을 잊지 않았다. [133~134쪽]
분명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인도와 이란이 '잘 하고 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점. 핵무기 개발해서 동네 위협하려는 자들은 모두 나쁘다. 북한의 핵 개발 시도도 나쁘다.
▷ 내게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력 사용의 정당성을 규정하는 일이라 대답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도적 개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증명이라는 무거운 짐이 남는다. 게다가 역사의 기록 앞에서도 우리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179쪽]
이 부분은 요새 관심 많이 갖고 있는 주제인데, 인도적 개입이 때로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럴 때에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될까? 피터 싱어가 ‘세계화의 윤리’에서 얘기한 대로, 현재로서는 ‘유엔의 판단’이 가장 타당한 기준이 될 것 같다.
유엔이 강대국 논리에 좌우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유엔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유엔이 강대국 입김에 휘둘리기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유엔이 분명 이라크전을 반대했었음을, 끝내 승인을 거부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미국은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전쟁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전쟁이란 무시무시한 것에 비판이라는 온건한 매를 드는 것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엔의 무기력함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이 인정하지 않은 침략전쟁에서 미국의 편을 들어 군대까지 보냈던 나라, 그 나라의 정부와 그 나라 국민들의 자세를 반성해보는 일 아닐까. 한국인들의 절반은 이라크 파병에 찬성했다. 적어도 한국인들의 절반은, ‘힘의 논리’와 연결지어 유엔의 무기력함을 욕할 자격이 없다.
▷ 시아파의 주도로 이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 지역을 포괄하는 느슨한 연대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 워싱턴에서 독립하고, 세계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연대이다. 그렇게 된다면 워싱턴에는 악몽이나 다름없다. 더 최악일 수도 있다. 이런 독립된 연대가 이란의 주도로 중국이나 인도와 손잡고 에너지 개발을 계획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시아 에너지 안보망 Asian Energy Security Grid’ 이나 ‘상하이 협력기구’와 손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세력권은 미국 달러에 의존하지 않고 석유를 중심으로 통화 바스켓을 바꾸어 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미국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에 중대한 타격일 수 있다.
...에드워드 웡은 뉴욕타임스에서 “남쪽으로 이란과 인접한 바스라 항은 과거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시아파 주도하에서 작은 신정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면서 “이란과의 결속이 뚜렷이 드러난다. 호메이니의 포스터가 길거리 곳곳에 나붙고 심지어 지방 정부 청사에도 붙어 있다. 이런 정부는 지난 6월 자국 선거기간 중에 이곳에 거주하는 이란인들을 위한 부재자 투표소까지 설치했다. 바스라 시장은 이란에서 전기를 사온다고 떳떳하게 말했다”고 덧붙였다. [255~256쪽]
▷ 이란의 분석가 아이자드 아흐마드는 “서구 세계가 쥐고 있는 세계 에너지의 공급권을 극복하고, 아시아의 절대적인 산업 혁명을 이루고자 한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아시아 에너지 안보망’에서 이란은 향후 10년 내에 실질적 중심축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한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여기에 합류할 가능성이 크며, 일본이 참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인도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가 중요한 변수이다. 인도는 이란과의 석유 파이프라인 협상에서 철수하라는 미국의 압력을 거부했다. 하지만 IAEA의 반(反)이란 결의안에서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편에 서면서 그들의 위선에 동참했다. 지금까지 이란이 그런대로 준수해 온 듯한 NPT 체제를 인도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인도에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미국의 위성국이 되어 미국의 보살핌을 받을 수도 있고, 이제 형태를 갖추어 가지만 한결 독립적인 아시아 블록에 참여해서 중동의 산유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 2005년 아시아의 에너지 생산국과 소비국이 모인 뉴델리 회담에서 인도는 시베리아 유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동 산유국과 에너지 소비국까지 범아시아 천연가스망과 석유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200억달러 규모의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 이미 모색 단계에 들어간 첫 단계는 아시아의 석유 시장 거래에서 유로화로 결제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국제 금융시스템과 힘의 역학 관계에 미치는 파장이 대단하리라 여겨진다. ‘힌두’의 부편집장은 “미국은 갓 태동한 아시아 연결망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인도라 생각한다. 따라서 인도와 연합해서 인도의 세계적 위상을 약속하고 핵 당근을 건네면서 새로운 지역 구도를 건설하는 과제에서 인도를 빼돌리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아시아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인도가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경고했다. [441~442쪽]
아주 큰 틀에서의 이야기인 셈인데, 어쨌든 인도가 ‘캐스팅 보트’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 글에서는 한국도 얘기되는데, 노무현 정권 들어서 한미관계의 균열이 외부에 많이 비치면서 한국의 ‘독립성’이 좀 높게 평가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옆에 있는 이상, 촘스키의 전망이 아주 틀릴 것 같지도 않다. 가설로만 놓고 봐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 미국 정보기관은 미국이 전통적 이유에서 중동의 석유를 계속 통제하겠지만 자체의 석유 수요는 주로 서아프리카, 서반구 등 더 안정적인 대서양 쪽의 석유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제 미국이 중동의 석유를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또한 세계 무대에서 미국의 고립을 현저하게 심화시킨 부시 행정부의 정책 때문에 가속화된 서반구 국가들의 결속으로 정보기관의 전망마저 위태로운 시정이다.
... 게다가 서반구 최대의 석유 수출국인 베네수엘라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중국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노골적으로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고 중국에 석유 수출을 증대할 것을 계획하면서 워싱턴의 에너지 정책에 타격을 가했다.
...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합병할 가능성까지 점치는 분석가가 없지 않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에서 한층 독립된 블록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통합되는 첫걸음일 수 있다. 베네수엘라는 남미 국가들의 관세 동맹인 메르코수르에도 가입했다. 독립적 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가 메르코수르에 가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메르코수르를 지역 전체로 확대한다는 지정학적 전망을 강화시켰다”고 평가했다. [443~445쪽]
베네수엘라와 중국의 관계가 피상적으로는 많이 다뤄졌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나 상호 접근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까지 중국의 ‘라틴아메리카 공략전’은 아프리카를 상대로 한 것에 비해 덜 부각돼 있어서 짐작하기도 힘들다. 우고 차베스는 볼리바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아직 ‘통합국가’까지는 아니지만 범 라틴아메리카 경제권 구상을 공개적으로 내걸고 있다. 이 쪽 행보는 어떻게 될까?
▷ 베트남과 이라크를 비교하는 것도 잘못이다. 베트남에서 워싱턴은 바이러스를 박멸하고 주변 지역을 예방접종하면서 전쟁의 주된 목적을 성취했다. 그리고 황폐한 땅으로 변한 베트남이 주권을 마음껏 누리도록 철수했다. 이라크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이라크는 완전히 파괴시킬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당이다. 너무나 가치가 큰 땅이다. 따라서 진정한 주권이나 제한적 민주주의도 너무 위험해서 쉽게 허락할 수 없다. 가능하면 이라크는 완전한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258쪽]
이라크가 과거 미국이 침공했던 그 어느 나라들보다도 전략적으로 미국에 중요한 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궁금한 것은, 옳건 그르건 미국이 갖고 있는 ‘재건된 이라크’의 상(像)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좌파 중에서도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프랑스 외무장관을 맡은 인도적 개입론자 베르나르 쿠슈네르 같은 사람들이 부시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한 반면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후쿠야마 같은 이들은 반대했다.
미국의 전통적 보수파들이 부시 행정부를 비판한 것은, 결국 부시행정부에 전후 이라크의 총체적인 그림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점, 혹은 그 그림이 너무도 이상주의적인 것이라 불가능하다는 점을 갈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그림조차 저렇게 망가져버린 지금, 미국은 어떤 ‘통제 전략’을 갖고 있는가? 최소한 이라크인들의 민주주의 의지와 수준은, 미국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태에서 말이다.
▷ “2005년1월의 선거가 실행되었던 이유가 미국 주도의 점령 당국이 제시한 세 안을 거부한 아야톨라 알리 시스타니의 강경한 입장 덕분이었다”고 보도한 파이낸셜타임스의 결론에 반박할 평론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동 전문가 앨런 리처즈도 “미국은 애초에 조기 선거를 반대했지만 아야톨라 시스타니가 추종자들에게 길거리로 뛰쳐나가 조기 선거를 요구하라고 지시하자 워싱턴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확인해주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야톨라 시스타니는 돌격 명령을 내렸다. 새 정부는 미국의 지도자나 미국이 지명한 지도자가 아니라 직접 선거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야톨라 시스타니의 뜻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고 보도했다. 종군기자 패트릭 코크번은 “미국이 시아파 폭동을 진압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조기 선거는 미국의 일관된 입장인 것처럼 즉시 돌변했다”고 덧붙였다.
... 이라크에서 점령군은 어쩔 수 없이 선거를 허락했지만 그 선거를 뒤엎어 버릴 방법을 궁리했다. 미국 측 후보자 이야드 알라위에게 온갖 이점이 주어졌다. 그러나 알라위는 12퍼센트의 득표로 3위 밖에 하지 못했다.
...선거는 ‘민족별 인구조사’를 방불케 했다. 시아파는 대부분 시스타니의 시아파 후보에게 투표했고, 쿠르드족은 쿠르드족 후보에게 투표했다. 수니파는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미 점령군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의 승리였다. 투표가 있던 날, 시아파와 쿠르드족은 뜨거운 열정과 용기를 가슴에 품고 “이 땅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힘을 요구하기 위해서” 투표장으로 달려갔다.
... 미국의 목표를 지지하는 엘리트 계급이 권력층을 차지하는 상의하달식 구조를 띄는 ‘민주주의’가 미국의 바람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요쉬 드레젠은 “이라크의 차기 정부를 끌어갈 듯한 사람들은 일요일의 선거가 끝나고 권력을 공식적으로 쟁취하자마자 철군을 요구하기로 약속했다”는 보도로 워싱턴의 고민을 요약해 주었다. [278~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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