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866

2005년의 첫 책, '잘못 들어선 길에서'

잘못 들어선 길에서 Auf Abwegen und Andere Verirrungen 귄터 쿠네르트 (지은이) | 권세훈 (옮긴이) | 문학과지성사 | 2000-11-30 "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으련다. 모두 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1730년 이후 여러 명의 산지기를 먹어치웠음을 고백하는 바다. 그들이 풍기는 역겨움에다가 값싼 담배, 사슴뿔 단추, 더러운 로덴천 등의 냄새는 내 식욕에 대한 충분한 형벌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백년이 넘도록 산지기를 두번 다시 건드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산지기를 먹어치운 '그 누구'를 상상하게 만들고, 압도되게 만들고, 기어이 충격을 주는 소설, 그리고 한바퀴 돌아서 어이없이 '그 누구'를 먹어치워버리는 세상에 대한 풍자. 귄터 쿠네르트, 동독 출신으로..

딸기네 책방 2005.01.05

패권인가 생존인가 - 번역 개판 촘스키 책

패권인가 생존인가 Hegemony or Survival : America's Quest for Grobal Dominance (2003) 아브람 노엄 촘스키 (지은이) | 오성환 | 황의방 (옮긴이) | 까치글방 | 2004-11-20 뭐랄까, '촘스키식 글쓰기'라고 해야할까. 어느정도 그런 식의 말투엔 익숙해진 것 같다. 촘스키의 전작들, 언어학에 대한 책들 말고 '미국'에 관한 책들을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은 낯익다 못해 솔직히 지겨운 감마저 든다는 점. 언뜻 떠올려봐도 '불량국가'라든가, '전쟁에 반대한다' 등등의 책들과 내용은 사실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촘스키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아직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저지른 일들은 (특히 국내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딸기네 책방 2005.01.04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말, 글, 이야기.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은이) | 이기우 | 임명진 (옮긴이) | 문예출판사 | 1995-02-01 오랜만에 재미난 책을 읽은 느낌. 평소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 것에 대한 지적인 도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다'- 이 책은, 바로 '책'과 '읽는다'는 것, '말'과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한 책이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모든 사회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이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문자와 책과 인쇄가 어떻게 인간의 사고방식을 시각적인 텍스트로 '고정'시켰는지에 관한 '책'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구술문화를 바라볼 것을 강조하는 저자의 요구가 다름 아닌 '책'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딸기네 책방 2005.01.04

방드르디, 그리고 '소설을 읽는 이유'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지은이) | 김화영 (옮긴이) | 민음사 | 2003-11-20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이 소설의 제목을 들어본지는 너무 오래되었고, 읽은지는 며칠 되었다. 리뷰를 올리기까지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방드르디의 생명력, 로빈슨의 철학, 그것들이 어우러져 어째서 내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이래서 소설을 읽는다. 철학, 역사, 과학, 결국은 한권의 소설이 그 모든 것들의 집결체가 아니던가.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세계'를 창조해냈다. 더불어 하나의 신화에 도전하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가 도전했던 것은 이성과 합리성의 신화(서양의 신화)이고, 그..

딸기네 책방 2005.01.03

올해는 내겐 '문학의 해'

올해는 내겐 '문학의 해'라고, 맘 속으로 정했다. 계획은 단순하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읽는 것. 세계문학전집,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세계, 문학, 전집... '전집'류를 읽은지 얼마나 됐을까? 어릴적 계몽사 동화집과 에이브, 세계역사 어쩌구 하는 10권짜리 책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집에 있었을 시퍼런 을유문화사 문학전집, 그보다 조금 커서 읽었던 사루비아문고와 삼중당문고 몇권, 대학교 때 끼고다녔던 창비시선 몇권, 그리고는 끝이었나. 생각해보면 내 머릿 속 추억의 책꽂이는 그때 그 책들로 가득 차 있다. 추억의 책꽂이 제일 윗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시절 누구나 한질 갖고 있었을 계몽사 50권짜리 주홍빛 동화집의 책들이다. 세계 여러나라의 민담들, 엘리너 파아전을 거기서 만났다. 책꽂이 ..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 매우 훌륭한 반미교과서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지은이)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04-11-25 조지 W 부시,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천박함'이다. 수퍼파워 미국을 이끈다는 작자의 입에서 나오는 언사들의 그 참을수 없는 천박함, 전쟁을 벌이면서 '충격과 공포' '무한 정의' 이따위 작전명을 붙이는 새대가리같은 작태, 그 천박함이란! 그 천박함 중의 일단을 드러내보였던 장면을 기억한다. 부시라는 작자가 이라크전쟁 '승리'를 선언한 뒤 무려 보잉사 무기생산공장에 몸소 찾아가서 전쟁 승리를 자화자찬하며 무기 PR에 열을 올리던 모습. 항공모함 선상에서 같잖게 군복 차려입고 종전을 선언했던 것보다도 부시의 천박함을 더더욱 극명하게 보여줬던 것은 아마도 보잉사에서 브리핑하듯 기자회견을 했던 그 모습이 아닐까 싶다..

딸기네 책방 2004.12.24

내 마음의 팜파스

내 마음의 팜파스 Far Away and Long Ago a history of my early life 윌리엄 헨리 허드슨 (지은이) | 이한음 (옮긴이) | 그린비 | 2003-09-05 1850년 무렵, 아르헨티나 팜파스.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 시기에,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라니!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1970년대,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같은 사람한테는 상상조차 힘들다. '내 마음의 팜파스'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팜파스에서 자라난 영국의 조류학자 윌리엄 허드슨이 어린시절을 돌아보는 회고담을 담고 있다. 아름답다. 상상도 할 수 없는 19세기 중엽의 팜파스를, 허드슨은 할아버지 옛날이야기같은 어조로 차분히 그려내 보인다. 그곳의 나무들, 새들, 짐승들, 그리고 ..

딸기네 책방 2004.12.22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Invisible Giant (1995, 2003)브루스터 닌 (지은이) | 안진환 (옮긴이) | 시대의창 유전자조작(GM) 농작물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정작 GM콩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브라질의 유명한 '좌파 지도자' 룰라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브라질은 세계적인 대두 생산국이고, GM콩과 일반콩 모두 대량재배하고 있다. 그래서 브라질의 룰라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선진국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자국내 농가들 때문에 GM 문제에서는 함구하거나,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글로벌화'된 세계농업의 한 단면이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에는, 여주인공 타이코..

딸기네 책방 2004.12.22

바지에 똥을 쌌어요

토프 시리즈 1 바지에 똥을 쌌어요 Tof a un gros proble'me 도미니크 매 (지은이) | 염미희 (옮긴이) | 문학동네어린이 | 2002-11-11 이 책 시리즈 몇권을 더 갖고 있는데, 특히 이 책이 참 재미있었다. 그림이 귀엽다. 특히 좋은 것은, 주인공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동물들'이 아니라는 점. 토끼 곰 고양이 다람쥐 등등이 나와서 비현실적인 육-초식 동물군단을 이루는 그림책들(그런 책들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보다, 상상의 여지도 더 많고 더 정답다. 아이가 "이건 누구야"라고 물어볼 때 간단하게 "악어" "곰돌이" 이렇게 대답해줄 수 없다는 점이 엄마로서 난감하긴 하지만. ^^ 줄거리도 단순하면서 재밌다. 똥을 싸는 것은 그렇게 챙피한 일은 아니예요, 재미있게 놀..

딸기네 책방 2004.12.19

정말 이쁜 그림책,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

새벽 유리 슐레비츠 (지은이) | 강무환 (옮긴이) | 시공주니어 | 1994-04-01 그림이 정말 이쁘다. 고요하다. 어두운 밤, 서늘하고 축축한 밤, 호수, 산. 먼동이 터오고, 고요한 새벽을 지나 찬란한 아침. 책의 줄거리는 '어둔 밤을 지나 아침을 맞는 호숫가 풍경' 뿐이다. 말 그대로 '그림책'이다. 제목 그대로 '새벽'을, 수채화풍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보여준다. 그림이 전해주는 분위기가 참 좋다. 폴란드인이라는 작가는, 언뜻 동양의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여백의 미 한껏 담긴 그림을 선사해준다. 글도 독특하다. 그림책 특유의 간지러운 문장 대신, 좀 무뚝뚝한 문어체라고 해야 할까. '고요하다' '산은 어둠 속에 말없이 지키고 서있다' 이런 식의 짤막한,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문장들이 가지런히..

딸기네 책방 2004.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