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 1140

피해다니기

항상 하는 얘기지만, 그리고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언제나 자기방어를 잘 한다고나 할까.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저 스스로 마음 편하기 위한 기제들을 잘 만들어놓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여우의 신포도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덕택에 언제나 '미련'이 없다. (좀 '미련'하기는 하지만^^) 돈들여 가방을 산 뒤에는 다른 가방 가게 앞을 지나가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가 산 가방이 제일 예뻐보인다. 사람이니까,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는데 늘상 남보다 쉽게 선택을 하고도 여간해서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났을 때 별로 가진 것(이쁜 얼굴 같은 것^^)이 없어 보여서 하느님이 선물로 그런 남다른(?) 능력을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게 재미있냐고 ..

은빛 여우

지난 주말에 조지 마틴의 판타지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를 열심히 읽었다.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냐면, 내 몸통이 거의 소설 속으로 들어갔다. 판타지 소설에 흔히 나오듯이, 각 등장인물들에게는 가문의 문장이라는 게 있다. 나는 내 문장을 '은빛 여우'로 정했다. 왜냐? 멋있어보일 것 같아서. 얼음과 불의 나라는 동부, 서부, 북부, 남부로 나뉘어 있는데 주인공은 북부의 영주이다. 그러니 내 눈에 북부가 가장 멋있어 보일 수밖에. 실은 나는 추운 곳을 아주 싫어하는데, 주인공을 따라서 북쪽 나라에 살기로 했다. 주인공보다 더 훨씬 북쪽에. 북쪽 나라에는 언제나 늑대가 있다. 그러니 나도 내 문장을 늑대 종류로 정해야 하는데 주인공 집안의 문장이 바로 다이어울프(늑대)가 아닌가.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늑대..

내 그림자 중의 하나는

내 그림자 중의 하나는 모든 그림자가 그렇듯이 늘 나를 따라다니는데, 그림자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고 정답게 생각하는 놈이다. 내가 간간이 사색을 할 때마다 내 뒤에서 나를 흘낏흘낏 바라보는 이 그림자는 가끔씩 건방지게도, 내 등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이 하는 일들을 지켜보기도 한다. 내가 지뢰찾기에 열중해 있을 때, 내가 컴퓨터 고스톱을 치고 있을 때, 내가 홈페이지에다 시덥잖은 소리를 쳐넣고 있을 때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들여다본다. 어린 아이들은 손가락을 자기 코 앞에 갖다대고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눈알을 가운데로 모으는 놀이를 한다. 난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그 놀이를 하는데, 손가락을 동원하지 않고 맨 얼굴로도 코 주위에 눈알들이 모이게 할 수가 있다. 그림자는 생선처..

H2

나한테도 열일곱살이 있었을텐데, 대체 어디로 갔을까. 바다 건너온 만화책이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놓다니. 내 마음은 지금 마구 흔들려서, 공중을 떠돌고 있다. 머릿속마저, 야구공처럼 어딘가를 한정없이 날아다니고 있다. 열일곱살. 그 나이를 떠올리면서 칙칙한 교실과 여고괴담 분위기의 유관순 초상화, 무거운 도시락통 같은 걸 떠올려야 된다는 건 비극이다. 그래서 난 좀 다른 걸 떠올려보기로 했다. 내가 열일곱살 때, 서울올림픽이 있었다. 그날, 친구와 올림픽공원에 갔었다. 9월17일, 날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올림픽 개막식 날이었으니까. 올림픽 공원에 갔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만한 추억거리가 그날 벌어졌던 것도 아닌데, 내 머리 속에는 열일곱살에 대한 그런 단편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조각조각 흩어진 기..

토요일밤에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됐나- 낮에 회사에서 대학 친구들과 이른바 '채팅'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MSN 메신저를 다운받으면 하루 종일 채팅을 할 수가 있다. 실은 '하루 종일'이라는 건 좀 맞지 않고, 내가 친구로 지정해놓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인터넷에 접속해 있을 때면 아무 때고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프로그램을 다운받았다. 회사 컴퓨터는 늘 켜져 있고 랜으로 연결돼 있으니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대화방'이라는 말과 '채팅룸'이라는 말은 참 다른 것 같다. 우리 말과 영어라서 다르다는 게 아니고, '채팅'은 잡동사니 수다를 떠는 것이지 '대화'라는 말로 번역되기엔 좀 그렇다는 의미다. 실제 내가 채팅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채팅'이었을 뿐이지 '대화'라고 ..

헬로 키티

모처럼 재미있게 주말을 보냈다. 뭐 특별히 '재미난' 일을 했던 건 아니지만, 나와 남편이 같이 주말에 집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 해도 우리 부부에겐 대단한 일이었다. 더우기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모두 외출을 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이 역사에 남을 외출의 첫 걸음은 토요일 오후 2시30분에 이뤄졌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정도로 일찍 일어난 것은 딸기의 허즈번드에게는 거의 있기 힘든, 매우 드문 일이다. 외출 장소는 일산 킴스클럽. 그동안 장 보는 것을 게을리한 탓에 집에 모자라는 것들이 많았다. 내 바지와 남편의 트레이닝복(일명 땀복이라 부르는 것), 라면, 귤, 김, 햄, 싱크볼, 뒤집개를 샀다. 그리고 남편의 숙원사업이던 키티 인형을 샀다. 이걸 사줬더니 남편은 간만에 주말 내내 ..

Being Digital?

오늘 일요당직을 섰다. 어제도 일토였는데 일요일까지 회사에 가서 사무실을 지켰다. 귓속에서 아직도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거린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종일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소음에 시달리다 돌아오니 이번엔 환청이 나를 괴롭힌다. 집에 혼자 앉아있는 순간에도 '조용히 있을' 수는 없다. 집에 들어와 눈치를 살펴보니 남편이 빨래를 해놓고 나갔다. 국을 데워 저녁을 먹을까 하고 있는 참에, 관리실에서 스피커로 내 머리를 때린다. 베란다로 이어져내려가는 하수구가 얼어붙으니까 세탁기 돌리지들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아뿔싸, 아랫층 베란다 하수구 다 얼었겠네... 방송 담당을 그만두고 나니 집에 와 앉아있는 것이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내 귓전에서 웅웅거리는 가장 큰 소음 중의 하나인 ..

괜한 걱정

어제 초등학교 친구 두 명을 만났다. '아이러브스쿨'에 가끔 들어가보지만, 사실 들어가봤자 나같은 사람은 별볼일 없다. 날 보고싶어하는 사람도 없고, 나 역시 특별히 보고싶은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그 두명이다. 두 친구와 용케 연락이 되어 어제 만났다.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2가 쪽으로 오는 길에 오른쪽에 있는 롯데리아로 오라고 친구가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찾아가긴 잘 찾아갔는데, 전철역에서 헤매느라 한 10분 늦었다. 하필이면 어제는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오는 통에 애들이 나 기다리면서 굉장히 걱정했다고 했다. 내가 안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난 어제 우리의 만남을 정말 눈 빠지게 기다렸다. 국민학교 졸업한 뒤에 중학교 다닐 때에도 동네에서 ..

앞뒤로 열린 가구

며칠 전 가구를 만들었다. 여성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홍대앞 '내가 디자인하고 내가 만드는 가구'에 주문을 했는데, 가장 맘에 드는 건 역시나 '내가 디자인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멋지게 폼나는 이쁜 가구는 아니니까 사실 '디자인'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을 떠올리면 안 된다. 그저 집성목을 이리저리 잘라 만든 보통 나무 가구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설계'를 하다보니 재미가 있었다. 내가 중점을 둔 것은 가구를 앞 뒤로 개방하는 것이었는데- 여느 가구처럼 벽에 붙여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 마루 가운데에 놓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높이 150센티, 폭 130센티, 너비 30센티. 맨 아랫칸은 현관 쪽으로 여닫이문을 달았고, 그 위의 두 칸은 마루 쪽으로 책꽂이를 냈다. 맨 위칸은 양쪽을 모두 '개방'했..

참새가 없는 세상

며칠전 누구누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참새 이야기가 나왔다. 참새 얘기가 나온 것도, TV 덕분이었다. 오랜만에 TV에 비친 참새를 봤는데 반갑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참새가 사라졌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참새시리즈는 한때 유행하는 농담의 대명사였는데, 요즘에는 골목에서 참새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걸까. 하긴, 골목 자체가 사라졌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골목의 문화' '골목살이'가 없어진 꼴이니까. (골목에 대해서는 지난해에 경실련 도시문화센터의 김병수 부장이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던진 화두인데, 언젠가는 글로 써보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골목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하여간에 참새가 사라졌으니 요즘 아이들은 아마 참새시리즈도 모르지 않을까. 내가 대학생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