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32

[구정은의 '현실지구'] USB로 애플 때린 유럽

유럽의회가 4일(현지시각)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 충전 포트와 커넥터를 USB-C 타입으로 통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4년부터 애플 제품에만 쓰이던 독자적인 충전장치는 유럽에서 팔지 못하게 됐다. 애플은 2년 안에 제품 디자인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랩톱은 2026년까지 충전 포트를 통일하면 된다고 유예기간을 좀 더 줬지만 결국 2024년 시한에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다른 형태의 충전장치가 ‘불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전 모델을 다 폐기해버리면 환경적으로도 나쁘다. 그래서 다른 장치들의 ‘단계적 퇴출’을 유도하기로 했다. 어쨌든 디지털 기기마다 충전장치가 달라서 C타입, B타입, 애플 타입 전선줄을 줄줄이 늘어놓고 살아야 했던 소비자들에겐 반가운 소리다. 유럽에서 ‘강제 통일’이 시..

[구정은의 '현실지구'] 레바논은 왜 우크라이나 옥수수를 거부했을까

배 한 척이 터키 남쪽에 멈춰섰다.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선적을 둔 ‘라조니’라는 화물선이다. 배에 실린 것은 옥수수, 힘겨운 국제협상 끝에 우크라이나에서 나온 곡물이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바다에 떠있다. 러시아의 봉쇄로 우크라이나에 묶여 있던 곡물들이 이달 들어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옥수수를 실은 배 두 척은 터키로 향했다. 아일랜드, 영국, 이탈리아, 중국으로 향한 선박도 있다. 8월 1일 첫 출항 이후 40만톤 가까운 곡물이 배에 실려나갔다. 우크라이나 항구들이 러시아군에 봉쇄당한지 다섯 달이 넘어가면서 식량 불안이 커졌다. 유엔은 이 봉쇄를 풀고 세계의 밥상 걱정을 덜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했다. 터키가 중재한 협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초르노모르스크 등 3개 항구를 거점으로 곡물 수출을 ..

[구정은의 '현실지구'] 보스니아와 우크라이나, 학살과 사과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민족갈등이 터져나와 극렬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1995년 7월, 보스니아의 스레브레니차라는 곳에서 세르비아군이 주민들을 끌고 가 학살한 뒤 구덩이에 한데 묻었다. 희생자가 8000명이 넘었고, 모두 무슬림 보스니아 남성들이었다. 유엔이 파견한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들은 세르비아군을 막지 않았다. 27년이 흐른 뒤인 지난 11일, 보스니아를 방문한 카샤 올롱그렌 네덜란드 국방장관은 당시 학살을 방치한 자국 군의 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장관은 "끔찍한 대량학살의 책임은 세르비아 군대에 있지만 국제사회가 주민들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한 것 또한 확실하다"면서 "네덜란드 정부는 당시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발칸 ‘제노사이드(..

[구정은의 '현실지구'] 아프리카, 난민, 르완다.

르완다 남서부에 위치한 니융궤 열대우림. 서쪽으로는 키부 호수와 콩고민주공화국, 남쪽으로는 부룬디 국경과 접한다. 아프리카 대륙 복판에서 가장 잘 보존된 열대우림 중 하나다. 2004년부터 이 일대 1000여㎢ 숲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침팬지와 원숭이 등 12종의 영장류를 비롯해 숱한 동물들이 살아가는 숲을 가로지르는 능선은 나일강과 콩고강 사이의 분수령을 형성한다. 키부 호수를 따라 북쪽으로 옮겨가면 비룽가, 멸종위기종인 고릴라들이 사는 곳이다. 아프리카 하면 흔히 떠올리는 밀림이 바로 이런 곳들이다. 유럽에도 ‘정글’이 있다. 영국과 마주보는 프랑스 도시 칼레. 영국으로 건너가려는 이주민, 난민들이 이곳에 모여든다. 칼레의 밀림이 형성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해협 아래 터널을 이용해, ..

[구정은의 '현실지구'] 피노체트 헌법과 칠레의 싸움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는 칠레 북부에 위치한 인구 40만명의 항구 도시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100km 떨어진 곳에 있다. 스페인에 맞선 독립전쟁 당시에 볼리비아와 칠레 사이에 영토분쟁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칠레는 19세기 말 '태평양 전쟁'으로 이 지역을 장악했고, 1904년 '평화우호조약'을 통해 분쟁을 끝냈다. 은과 질산칼륨 광산을 주변에 둔 주요 수출항이기도 하지만 칠레 입장에선 독립과 영토 주권에 관련된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엔 후안차카가 있다. 토착민 언어인 케추아(Quechua) 말로 '슬픔의 다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면 마치 고대의 석조사원처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 버려진 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은 고대의 성채..

[구정은의 '현실지구'] 미-중 패권다툼에 '땅뺏기'까지 벌어지는 솔로몬제도

처음 섬에 발을 들인 유럽인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찾아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파푸아뉴기니 부근에 있는 솔로몬제도. 9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남태평양의 이 나라는 어쩌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을까. 156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닿은 스페인 선원 알바로 드 멘다냐는 대단한 보물이 있을 줄 알고 기독교 구약성서 속의 ‘부자 왕’ 이름을 따서 솔로몬 섬Islas Salomón이라 명명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섬에서는 어디에서나 흔한 ‘식민지 역사’가 시작됐다. 3만년 전부터 라피타Lapita라 불리는 태평양 섬 원주민들이 살아온 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배들의 방문이 이어지더니 19세기 말에 영국 땅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미국과 영국 군대가 솔로몬제도의 ..

[구정은의 '현실지구'] 우크라이나, 팜유와 밀가루

팜유Palm oil. 이름 그대로 팜(기름야자)의 열매에서 뽑아낸 기름이다. 빵을 만들 때 버터 대신 쓰기도 하고, 식용유로 쓰기도 한다. 제조업에도 널리 쓰인다. 비스킷, 초콜릿, 비누와 세제 등 온갖 다양한 상품에 팜유가 들어간다. 해마다 7000만~8000만 톤의 팜유가 생산되는데 생산과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인도네시아다. 세계 수출량의 60% 정도를 인도네시아가 차지한다. 팜유는 석유보다 탄소배출량이 적어 바이오디젤 원료로 쓰이는데, 정작 보르네오 섬은 팜 농장들이 늘면서 숲이 사라져간다. 환경단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17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팜유 수출세를 대폭 올렸다. 선적할 때마다 수출세를 내는데 거기에 별도로 수출부담금을 매기고, 누진율까지 적용하기로 ..

[구정은의 '현실지구'] 제재 받는 푸틴 측근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금 서방의 ‘공적’이다. 어떤 이들은 20년 넘게 러시아를 쥐락펴락해온 그를 차르(황제)라 부르고, 어떤 이들은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한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를 ‘살인자’라고 불렀다. 가뜩이나 사이가 나쁜 두 나라가 서로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사태까지 가게 만든 발언이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주변에 러시아군이 결집하고 크렘린이 전쟁을 위협하자,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이를 히틀러의 전쟁에 비유하며 푸틴을 ‘자국민을 착취해 세계 최고 부자가 된 사람’으로 비난했다. [미 재무부] U.S. Treasury Imposes Immediate Economic Costs in Response to Actions in the Done..

[구정은의 '현실지구']동유럽의 냉전, 다시 부딪치는 '두 세계'

우크라이나 주변에, 상투적인 표현을 빌면 ‘전운이 감돈다.’ 존 커비 미 국방부 대변인은 24일(현지시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군 8500명이 우크라이나 일대에 배치됐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 강경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영국 등은 우크라이나 대사관 직원들과 가족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고, 독일과 호주도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를 넘어 옛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동유럽 국가들로 긴장이 확산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알라르 카리스 대통령은 폴리티코 인터뷰에서 “나토가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며 “에스토니아에 나토군이 더 주둔하길 바란다”고 했다. 전임자인 케르스티 칼률라이드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

[구정은의 '현실지구'] 고래들은 쉴 수 있을까

남아프리카공화국 고등법원이 12월 27일(현지시간) 석유회사 셸의 지진탐사를 중단시키는 판결을 내렸다. 셸은 동부 이스턴케이프주 일대 와일드코스트 앞바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지를 알아보기 위해 탐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현지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이 탐사가 해양생태계에 큰 충격을 준다며 시위를 하고 소송을 냈다. 앞서 고등법원의 또다른 재판에서는 법원이 셸의 편을 들었지만 이날 두번째 재판에서는 법원이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의 손을 들어줬다. 해양 전문가들이 나와서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음을 지적했고, 셸은 납득될만한 반박을 하지 못했다고 재판부는 설명했다. 셸은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고만 했다. 앞서 셸은 “법원이 금지시킨다면 전체 탐사계획을 중단할 것”이라고 했는데, 최종판결까지 법적 절차들이 남아 ..